대통령 선거 기간중 부산에서 유세를 하고 있는 노무현 당선자(왼쪽 가운데).부산시내에 내걸린 당선사례 현수막(오른쪽)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득표율이 경남 최고인 75%를 기록한 진주지역의 한나라당 소속 한 도의원은 “참 열심히 뛰었다. 체감 지지도가 그렇게 높았는데 이후보가 떨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요즘 주변 사람 중엔 ‘TV나 신문 보기가 싫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며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진주는 한나라당 하순봉 최고위원의 지역구. 그래서 ‘이후보가 당선되면 총리자리는 따놓은 당상’이라는 기대심리가 퍼져 있어 이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높았다는 분석이다. 한 관계자는 이후보의 정계은퇴 발표 때 하최고위원이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TV로 지켜본 한나라당 당원들 중 상당수가 함께 눈물을 훔쳤다고 전했다.
차갑고 무거운 분위기 딛고 이젠 ‘희망’
이번 대선의 최대 승부처로 평가받았던 부산 울산 경남, 이른바 PK지역의 대선 이후 분위기가 미묘하다. ‘자갈치 아지매’가 TV 찬조연설을 통해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자 한나라당 대중집회에 ‘노무현은 부산 사람이 아니다’라는 비상식적인 현수막이 내걸렸던 곳이다. 이런 상황과 노당선자가 속해 있는 민주당에 대한 상당수 지역민들의 ‘적대적 시선’ 때문에 선거 직후 며칠 동안 이 지역 분위기는 차분하다 못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특히 투표 당일 밤 서울과 광주, 전남·북 등에서 노당선자의 당선을 축하하는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것과는 달리, 마산역 광장 등에서의 노사모 회원 자축연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대중적 감격과 기대는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취재 기자들이 ‘환희의 현장’을 찾지 못해 애를 먹을 정도였다. 당선 축하 플래카드도 부산과 김해, 진주 등 일부 지역에서 노당선자 명의로 ‘감사합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내걸렸을 뿐이다. 그만큼 PK지역의 한나라당 지지 정서는 공고했고, ‘여론조사에서는 비록 뒤진다고 해도 실제 표를 까보면 결과는 다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심리가 팽배해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지역 주민들로서는 ‘노무현 당선’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 적지 않은 시일이 걸렸다.
그러나 선거가 끝난 지 열흘 가량이 지나면서 노당선자에 대한 ‘희망의 싹’이 PK지역 저변에서 서서히 돋아나고 있다. 이회창 후보 패배 이후 선거 얘기가 자취를 감췄던 시내 술집 등에서 다시 정치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 게 그 징조다. 그중에는 ‘노당선자가 변화와 개혁을 잘 이루어 나갈 것이다. 기대해볼 만하지 않겠느냐’는 내용도 적지 않다. 지역 오피니언 리더의 분위기는 훨씬 더 속도감이 있다. 경남도청 한 고위간부는 “좀 덜 배우고, 어렵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결과가 나왔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한다”면서 “만약 이회창 후보가 당선됐더라면 여전히 서민과는 거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정치팀장은 “실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기대도 크다. 민주당과 김대중 대통령을 욕하는 사람은 있어도 노무현 개인을 비난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회창을 지지하긴 했지만 노무현 당선에 대해 실망하거나 낙담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노무현이 잘 돼야 한다는 게 대체적인 바닥의 정서다”라고 정리했다.
그러나 호남에서 노당선자가 얻은 몰표에 대한 씁쓸함은 아직 채 가시지 않았다. 몰표 논란은 한때 경남도청 공무원직장협의회 홈페이지 등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논란도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려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진주의 회사원 신현배씨(43)는 “1번을 찍은 사람들도 이회창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실정에 대한 심판 성격이 강했다. 호남에는 후보들이 가지 않거나, 가봐야 소용이 없다고들 했는데 우려했던 것 이상으로 몰표가 나왔다”고 말했다. 반면 경남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강창덕 대표는 “지금까지는 ‘호남의 아들’이라는 DJ에 대한 몰표였지만, 이번 몰표는 ‘영남의 아들’인 노당선자에 대한 호남인의 지지라는 점에서 오히려 지역감정을 청산하고자 하는 의지가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당선자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노당선자에게 투표를 했다는 사람이 실제 투표인 수보다 훨씬 많아 보인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좋아지고 있다. 분명히 선거 전에는 이회창 후보 지지자였는데 지금은 “누구에게 투표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노무현”이라고 목청을 돋울 정도다. 한 자영업자는 “‘DJ 양자’라는 비아냥거림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노당선자가 부산에 선물을 주지 않겠느냐는 심리가 시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고 전했다. 30여년간 채소장사를 해온 조명옥씨(68)는 “노당선자는 없는 사람, 못 배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따뜻함을 주는 친근감 들게 하는 분 같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돈 걱정, 나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편안한 정치를 해줬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말했다.
지역감정의 골 메우기 최우선 과제
고등학교 교사인 황남훈씨(43)는 “이번 대선을 통해 지역감정의 골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도 드러났으나 부산을 비롯한 영남권의 표심을 분석해볼 때 지역민심이 상당히 ‘업그레이드된’ 것을 알 수 있다”며 “노무현의 당선을 통해 정치의 발전과 지역감정 해소, 구시대 정치 청산 등 많은 숙제가 해결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는 데 한국의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노동자의 도시 울산에서도 노당선자에 대한 기대는 부산 못지않으면서도 불안감 또한 적지 않았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에게 투표했다는 현대자동차 직원 김모씨(36)는 “1998년 정리해고 반대 파업 당시 노당선자가 울산에 내려와 끈질기게 노사 양측을 설득했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면서 “이회창 후보보다는 친노동자 쪽인 노후보가 당선된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 반면 40대 초반의 한 자영업자는 “노당선자는 ‘뭔가 불안하다’는 인상에 변함이 없다”며 “이제부터라도 노당선자는 모든 말과 행동이 국가 앞날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잘 생각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울산시청의 한 간부도 “이회창 후보가 당선돼 흐트러진 국가기강을 바로잡았으면 했는데 아쉬움이 크다”며 “DJ정권 5년간 목소리가 높아진 시민·사회단체들을 잘 다독여 법과 질서가 바로 서는 나라를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때 미묘한 분위기를 보였던 PK지역에서 서서히 노당선자를 ‘영남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개표 다음 날 “이민이나 가야겠다”는 말이 장년층을 중심으로 퍼졌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PK지역의 ‘반(反)노무현 정서’가 엄존하는 것도 현실이다. 노당선자가 어떻게 이를 극복해 진정한 지역통합, 국민통합을 이루어낼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