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4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아탈 바즈빠이 인도 총리의 정상회담. 푸틴 대통령 취임 이후 인도와 러시아는 전에 없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인도-파키스탄 사이의 긴장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12월 초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인도를 공식 방문했다. 푸틴 대통령의 방문과 러-인 정상회담은 남아시아 국제관계에 있어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다. 푸틴 대통령의 적극적인 친(親)인도, 반(反)파키스탄 입장이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양국 정상이 조인한 ‘델리 선언’도 파키스탄의 인도 내 테러 지원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러시아의 태도는 인도 정부를 크게 고무시켰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한 미-파키스탄 간의 ‘밀월관계’에 따른 인도의 불만이 러시아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인도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반대함으로써 러시아의 호의에 보답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인도의 바즈빠이 총리는 2년 남짓한 기간 중에 세 차례 정상회담을 했다. 그만큼 최근 러시아와 인도의 관계는 우호적이다. 옐친 대통령 시절 소원했던 러-인 관계가 푸틴 대통령 취임 이후 점점 밀착되어가고 있는 인상이다. 특히 세계 최초의 초음속 미사일 ‘브라모스’를 공동개발하고 러시아산 전투기를 인도가 수입하는 등 군사면에서의 인도와 러시아의 결속력은 공고하다. 여기에 더해 최근의 러브콜은 남아시아 지역 외교에 부활하는 새로운 기류를 짐작케 한다.
푸틴, 인도 방문 이어 베이징 찾아
과거 냉전시대에 인도는 비동맹 외교를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소련과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또 파키스탄을 배척하고 주변 약소국인 방글라데시를 지원했다. 파키스탄은 이러한 소련-인도-방글라데시의 친선관계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중국과 밀접한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이 이중의 삼각관계는 ‘남아시아 3각 외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런데 인도에서의 사흘간의 일정을 마친 푸틴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베이징. 베이징에서 푸틴은 ‘다국적 세계질서’라는 개념을 인용한 연설을 했다. 인도 언론은 자연스럽게 러시아-중국-인도의 신(新)삼각연대를 상기했다. 물론 탈냉전 시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이 러시아를 제치고 국제질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만큼 과거와 같은 가시적인 적대관계가 형성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새로운 3국연대가 국제문제에 있어서의 미국의 독주를 막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조심스러운 추측이 나오고 있다.
사실 러-중-인의 3각연대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1999년 러시아 총리였던 프리마코프는 뉴델리를 방문해서 이 같은 3각연대를 제안했다. 서방 정치평론가들은 여기에 ‘탈냉전 시대의 반미세력 결집’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주었다. 2000년에 러시아, 중국, 인도의 국가 지도자들이 잇따라 회담을 하자 3국 사이의 전략적 관계가 언론에 오르내렸다. 작년에 러시아 외무장관인 이바노프가 뉴델리를 방문하면서 3각연대는 다시 가시화되었다. 베이징에서 3국의 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략적 3각연대’에 대한 학술회의가 개최되어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3자간 연대를 성사시키려는 노력은 역시 신3각연대를 처음 제안한 러시아가 가장 적극적이다. 지난해의 학술회의도 러시아의 노력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그러나 인도와 중국의 입장에서는 이 연대가 그렇게 달갑지만은 않다. 양국은 모두 러시아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잘 유지해온 반면, 인도와 중국 사이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현안들이 많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국경문제를 들 수 있다. 인도와 중국은 서로 상대국이 자신의 영토를 불법점유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현재는 ‘실제 통제선(LAC: Line of Actual Control)’을 잠정적 국경으로 삼고 LAC 주변 지역에 대한 정기회의도 열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양국은 62년 국경문제로 전쟁까지 치른 과거사가 있다. 이런 이유와 ‘대국(大國)의 자존심’이 묘하게 얽혀서 인도와 중국은 서로를 경쟁국으로 인식하고 있다.
또 인도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파키스탄에 대한 지속적인 지지 입장도 못마땅하다. 중국은 인도에서 일어나는 각종 테러사건의 책임이 전적으로 파키스탄 정부에 있다고 보지 않으며 파키스탄을 테러 지원국으로 규정하려는 인도 정부의 입장에도 반대하고 있다. 러시아의 일방적인 ‘인도 편들기’와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국 사이에는 서로 공유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우선 3국 모두 국내의 이슬람 분리주의 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 카슈미르의 분리독립 주장으로 골치를 썩고 있는 인도는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 역시 인구의 19%가 이슬람교도다. 최근 모스크바 국립극장에서 인질극을 벌였던 체첸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이슬람 소수민족들은 러시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격렬하게 요구해왔다. 중국도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 위구르족의 분리주의 세력이 워낙 강해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다.
국제정세 따라 한목소리 가능성
러-중-인 3국은 현재의 국제질서를 좌지우지하는 미국에 대한 견제세력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공유한 상태다. 러시아는 냉전 종식 이후 꾸준히 친서방 정책을 표방해왔지만 최근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발트해 연안 확대에 위협을 느끼며 새로운 영향권을 찾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로 미국과 파키스탄의 관계가 밀착되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인도 역시 남아시아 지역 내 영향력과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중국은 또 중국대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자국 내 인권문제를 계속 걸고넘어지는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이중적 잣대’를 이용한 국제관계에서의 독주에 대한 반발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중국-인도를 잇는 3각연대는 현재 큰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인도와 중국은 국경분쟁과 파키스탄 문제로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고, 러시아 역시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는 눈치다. 그러나 이들 세 나라의 입장과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가 일치하는 만큼 작은 변수로도 전략적 신3각연대가 가동할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