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갈 때는 박찬호 선수처럼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야구에서만큼은 기회와 가능성의 땅처럼 보였으니까요.”
김선수는 중앙고 3년 때인 97년 8월 레드삭스 스카우터들의 눈에 띄어 미국 진출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시속 150km에 가까운 강속구를 던질 수 있었던 그는 함께 테스트에 참가한 4명의 고교선수들을 제치고 3루수에서 일약 투수로 스카우트됐다. 그러나 제구력이 문제였다. 미 프로야구 마이너리그에서 선발과 중간계투를 오락가락하던 김선수는 제구력의 난조를 보이며 패전이 늘어갔고, 그 이후 출전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언어 장벽과 쥐꼬리만한 연봉, 그리고 향수병도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시즌이 끝나면 월급도 주지 않습니다. 끼니를 굶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김선수가 미국생활을 정리하려고 마음 먹을 즈음인 지난해 가을 보스턴 레드삭스 구단은 김선수의 방출을 통보했다. 다른 구단을 알아보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는 마침내 메이저리거의 꿈을 포기하고 지난 2월 귀국했다.
“미국에 진출하려면 마이너리그의 고통을 알고 가야 합니다. 마이너 없는 메이저는 없습니다. 제2의 박찬호는 꿈일 뿐입니다. 현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김선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한번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려는 꿈을 꾸고 있다. 제2의 야구인생을 살고 있는 그는 지금 ‘현실’에서부터 다시 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