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작센주의 수도 드레스덴시에서는 2차대전 막바지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잿더미로 변한 프라우엔키르헤(여성교회)의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유럽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설현장이자 독일시민운동의 가장 큰 성과로 평가받는 여성교회의 복원은 전례가 없는 국제적 지원을 받고 있다.
1743년에 건설된 바로크 양식의 여성교회는 반원형의 석조 천장을 가진 아름다운 건물일 뿐만 아니라 알프스 북쪽에서는 유일하게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과 비교할 수 있는 드레스덴시의 상징이다. 이 교회가 드레스덴 시민에게 사랑을 받아온 이유는 건물의 아름다움과 함께 건설 당시 지배자였던 가톨릭 작센 왕조에 대항하는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저항정신이 이 건물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자발적 헌금으로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역사적 교회 복원작업은 드레스덴 문화재 관리의 산증인이자, 올해로 90세의 장수를 누리고 있는 한스 나들러 교수에 의해 주도됐다. 45년 당시 35세의 문화재 보존전문가였던 나들러는 교회 폐석들의 부분적 철거가 시작되던 48년 겨울부터 856개의 돌을 일일이 헤아리고 기록을 남겼다.
옛돌을 원형 그대로 사용하기 위해 그는 95t이나 되는 대형 돌조각을 지정된 제자리에 올려놓는 데만 10만 마르크의 비용을 투자했다. 가능한 한 새 돌의 양을 줄이려는 그의 ‘안간힘’은 복원된 교회에 정체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지난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나들러의 외로운 고고학적 복원작업에 15명의 저명인사들이 동참하면서 개인과 기업들로부터 후원 의사가 쇄도했다. 당시 총리였던 콜은 1990년 예정했던 60세 생일 축하연을 취소하고, 75만 마르크를 쾌척했다. 이후 복원후원회에는 독일 및 전세계로부터 약 1만1000명의 회원이 가입했으며 올 2월13일, 영국의 켄트 공작은 ‘영국 시민의 이름’으로 교회 원형지붕의 황금 십자가를 기증했다. 이것을 만든 금세공가 알란 슈미트(Alan Schmith)의 아버지는 드레스덴 폭격 당시 폭격기 조종사였다.
건설 현장에 방문객 줄이어
드레스덴시의 여성교회 복원을 두고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독일 스스로 야기한 전쟁의 대가로 폐허가 된 교회의 완전복원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 차라리 교회의 폐허를 ‘반전’(反戰)의 ‘경고비’로서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게 반대론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복원론자들은 이런 ‘근본적 회의’의 이면에는 독일 시민들을 ‘전쟁의 야기자’, 또는 ‘가해자’로서만 바라보는 고정된 시각이 숨어 있다고 반박한다. 독일시민들은 가해자일 뿐만 아니라 그 전쟁의 희생자이기도 하다는 것이 복원론자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드레스덴 지역에 대한 영국군과 미군의 공중폭격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악몽으로 남아 있다. 특히 나치의 패전 당시 처참한 파괴를 경험한 60∼70세 정도의 성인들에게는 역사에 대한 반성과 함께 자신의 피해에 대한 심리적 치유도 간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어 있다. 이들은 자손들에게 ‘치유의 새로운 상징’을 남기고 싶어했고, 그 대상으로 드레스덴시의 여성교회를 찾아낸 것이다.
여성교회는 현재 30m까지 올라갔다. 완성되고 나면 높이 90여 m에 이르는 웅장한 건물이 된다. 아직은 그 유명한 둥근 지붕도 볼 수 없는 혼란스러운 건설현장에 불과하지만 방문객은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해 총 방문객 수는 16만5000명이었고, 올해는 약 22만5000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독일시민들은 여성교회의 복원을 통해 아픈 과거의 청산작업과 함께 인터넷 공간에서 가상적 현실과 씨름하는 젊은세대들에게 ‘과거의 세계’이면서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제의 공간’을 건설해주려 하고 있다.
1743년에 건설된 바로크 양식의 여성교회는 반원형의 석조 천장을 가진 아름다운 건물일 뿐만 아니라 알프스 북쪽에서는 유일하게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과 비교할 수 있는 드레스덴시의 상징이다. 이 교회가 드레스덴 시민에게 사랑을 받아온 이유는 건물의 아름다움과 함께 건설 당시 지배자였던 가톨릭 작센 왕조에 대항하는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저항정신이 이 건물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자발적 헌금으로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역사적 교회 복원작업은 드레스덴 문화재 관리의 산증인이자, 올해로 90세의 장수를 누리고 있는 한스 나들러 교수에 의해 주도됐다. 45년 당시 35세의 문화재 보존전문가였던 나들러는 교회 폐석들의 부분적 철거가 시작되던 48년 겨울부터 856개의 돌을 일일이 헤아리고 기록을 남겼다.
옛돌을 원형 그대로 사용하기 위해 그는 95t이나 되는 대형 돌조각을 지정된 제자리에 올려놓는 데만 10만 마르크의 비용을 투자했다. 가능한 한 새 돌의 양을 줄이려는 그의 ‘안간힘’은 복원된 교회에 정체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지난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나들러의 외로운 고고학적 복원작업에 15명의 저명인사들이 동참하면서 개인과 기업들로부터 후원 의사가 쇄도했다. 당시 총리였던 콜은 1990년 예정했던 60세 생일 축하연을 취소하고, 75만 마르크를 쾌척했다. 이후 복원후원회에는 독일 및 전세계로부터 약 1만1000명의 회원이 가입했으며 올 2월13일, 영국의 켄트 공작은 ‘영국 시민의 이름’으로 교회 원형지붕의 황금 십자가를 기증했다. 이것을 만든 금세공가 알란 슈미트(Alan Schmith)의 아버지는 드레스덴 폭격 당시 폭격기 조종사였다.
건설 현장에 방문객 줄이어
드레스덴시의 여성교회 복원을 두고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독일 스스로 야기한 전쟁의 대가로 폐허가 된 교회의 완전복원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 차라리 교회의 폐허를 ‘반전’(反戰)의 ‘경고비’로서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게 반대론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복원론자들은 이런 ‘근본적 회의’의 이면에는 독일 시민들을 ‘전쟁의 야기자’, 또는 ‘가해자’로서만 바라보는 고정된 시각이 숨어 있다고 반박한다. 독일시민들은 가해자일 뿐만 아니라 그 전쟁의 희생자이기도 하다는 것이 복원론자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드레스덴 지역에 대한 영국군과 미군의 공중폭격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악몽으로 남아 있다. 특히 나치의 패전 당시 처참한 파괴를 경험한 60∼70세 정도의 성인들에게는 역사에 대한 반성과 함께 자신의 피해에 대한 심리적 치유도 간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어 있다. 이들은 자손들에게 ‘치유의 새로운 상징’을 남기고 싶어했고, 그 대상으로 드레스덴시의 여성교회를 찾아낸 것이다.
여성교회는 현재 30m까지 올라갔다. 완성되고 나면 높이 90여 m에 이르는 웅장한 건물이 된다. 아직은 그 유명한 둥근 지붕도 볼 수 없는 혼란스러운 건설현장에 불과하지만 방문객은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해 총 방문객 수는 16만5000명이었고, 올해는 약 22만5000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독일시민들은 여성교회의 복원을 통해 아픈 과거의 청산작업과 함께 인터넷 공간에서 가상적 현실과 씨름하는 젊은세대들에게 ‘과거의 세계’이면서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제의 공간’을 건설해주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