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YS)이 민주당 이인제 최고위원에 대해 “여권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가장 유력하며 대통령 당선 가능성도 아주 높다”고 말한 한 월간지 인터뷰 내용이 알려진 10월17일 한 동교동계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YS가 요즘은 대세를 읽지 못하고 있지만, 순간적으로 정치의 맥을 짚는 솜씨만큼은 녹슬지 않은 것 같다. 정치는 타이밍인데, YS는 어떤 발언을 언제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순전히 본능적인 감이랄까. YS는 이 발언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도 경고를 보내는 등의 성과를 노리고 있다.”
이 인사의 분석은 어떤 의미일까. 김대통령은 차기 대통령 후보의 가시화 시점을 2002년 1월(민주당 전당대회 시점)로 잡고 있다. 김대통령은 8·30 민주당 전당대회와 관련해 “이번 전당대회는 대권, 당권과 관계없다”고 말했고, 지난 8월31일에는 “차기에 대한 논의는 각 정당의 후보 경선대회가 임박할 때쯤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YS를 비롯한 전임 대통령들이 그랬듯 김대통령 역시 후계구도 확정시기를 최대한 늦추려는 것.
그러나 차기 대권주자 가시화 시점을 늦추고, 당내에서도 이와 관련한 움직임을 억제하려는 김대통령의 의도는 전당대회 이후 이인제 최고위원을 필두로 최고위원들이 활달한 행보를 보이면서 사실상 흐려진 측면이 있다. 그러던 차에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고, 김대통령의 당에 대한 장악력이 다시 높아지면서 예비주자들 역시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최고위원들 차기 노린 발빠른 행보
YS의 ‘이인제 발언’은 바로 이런 때에 등장했다. 차기와 관련된 여권의 움직임이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려는 시기에 돌출한 YS 발언은 이인제 최고위원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다른 예비주자들을 강하게 자극했다. 다른 예비주자들은 김대통령 눈치를 보면서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 이는 YS 의도대로 김대통령이 골치가 아파질 수 있는 상황이다.
민주당 김중권 최고위원은 10월17일 전-현직 언론인들의 모임인 ‘좋은이웃 토론모임’(회장 남시욱 전 동아일보 상무) 초청 강연회에서 4년 중임 정-부통령제로의 개헌론을 정식으로 꺼내들었다. 김최고위원은 특히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대통령이 임기를 다하면 부통령이 다음을 승계하는 게 선진 민주국가인데 우리나라는 부통령이 없어 새로운 인물을 기르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 “정당의 주요 기능 중 하나가 인물배양인데 우리 정당은 그렇지 못해 어떤 때는 ‘깜짝 놀랄 만한 후보’가 나오고, 어떤 때는 ‘제3의 후보’ 얘기도 나온다”고 강조했다. 노벨평화상으로 잠잠해지는 듯했던 여권의 ‘대권 후보 조기 가시화론’에 재차 불을 지핀 것.
여권에서 ‘차기 후보 조기 가시화론’이 처음으로 공론화된 것은 10월11일 민주당 재야 출신 모임인 ‘국민정치연구회’(이사장 이재정 의원) 월례토론회에서였다. 이날 초청 인사인 고려대 임혁백 교수(정치학·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는 “(대선 직전에) 무작정 나타나 대통령의 낙점을 받은 걸로 표를 얻을 수 없다”면서 “대권 후보를 지금 가시화해도 늦다”고 강조했다. 특히 임교수는 “(2002년 1월 전당대회를 통해 후보를 선출하면) 1년 만에 가능하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최고위원을 포함한 여권의 대권 예비후보들에게 역할을 맡겨 그들이 성공사례를 만들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정당은 평소 정치인물을 발굴, 국민에게 선보이고 검증해야 한다”는 김중권 의원의 ‘인물 배양`-`검증론’은 원론적 수준인 듯해도 임혁백 교수의 ‘차기 후보 조기 가시화론’을 재차 강조한 측면이 짙다고 보인다. 김근태 최고위원 역시 “당의 인재가 개혁의 기수로 성장하도록 하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후보군을 일찍 가시화시켜 검증하는 단계를 거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김대통령과 청와대의 뜻과 달리 민주당에서 ‘차기 문제’가 자주 거론되는 것은 아직 뚜렷한 ‘이회창 대항마’가 부각돼 있지 않은 당내 사정 때문이다. 한 당직자는 “인위적으로 누른다고 해서 눌러질 수 없는 것이 후보 조기 가시화론”이라며 “정권 재창출에 대한 확신이 옅어질수록 ‘확정된 후보’를 기대하는 마음이 커질 것”이라고 진단한다. “옛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미국의 부시 행정부 등 내정에 실패한 정권은 모두 재집권에 실패했다”는 임혁백 교수의 강조처럼 요즘 여권 인사들에게는 내치의 불안정성이 재집권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차기를 염두에 둔 인사들의 행보가 점차 빨라지는 것도 후보 확정 시기와 재집권의 불안감이라는 묘한 길항관계에서 출발한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40대 돌풍’을 일으킨 정동영 최고위원은 10월18일 고려대 경영대학원, 21일 건국대, 11월 초 부산 외대 초청 강연회 등 전국을 도는 ‘특강 정치’를 계속 진행중이다. 10월 초에는 부산지역 원외지구당 위원장 세미나에도 참석하고 제주대에서도 특강을 했다. 정위원측은 “영남권에 확실한 교두보를 구축하지 못하면 재집권이 어렵기 때문에 당 차원의 지지기반 확대를 위해 영남권을 자주 찾는다”고 말하고 있으나 ‘당 차원’만의 강연은 아닌 듯하다.
정위원은 고려대 특강에서 YS에 대해 “요즘 같은 지방화시대에 고향에 내려가 후진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내는 국가 원로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YS 낙향론’을 주장했다. 정위원의 이날 발언은 민주당 최고위원들이 아무도 YS에 대해 정면으로 공박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나온 일종의 ‘차별화 전략’으로 비친다.
정대철 최고위원 역시 11일 ‘팍스코리아 21’ 주최 조찬 포럼에 참석하는 것으로 강연 정치를 재개했다. 정위원은 31일 경상대, 11월2일 예산 산업대, 11월9일 부산 동아대 등 거의 매주 전국을 누비는 스케줄을 짜놓고 있다. 정위원은 대권 도전 여부에 대해 “개인적으로 야심이 있다”고 솔직히 인정하면서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선 국민의 지지, 당원의 선출, 본인의 자질 등 3박자가 맞아야 한다”고 전제 조건을 달았다.
이처럼 이인제 김중권 정동영 정대철 등 최고위원들의 ‘차기 행보’가 빨라지는 가운데 한화갑 최고위원만이 침묵을 지키며 ‘해외’에 주력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한위원은 9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국제정당회의와 로스앤젤레스 한인회 주최 ‘한국의 날’ 행사에 잇따라 참석한 데 이어, 10월22일 다시 4박5일 일정으로 방미했다. 한위원은 헤리티지 재단, 브루킹스 연구소, 조지타운 대학 등 세 곳에서 한반도 문제 관련 특강을 한다. 한위원은 당분간 가급적 국내 현안에 거리를 둔 채 ‘국제적 비중’을 높이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최고위원들의 다양한 행보를 보면 여권은 김대통령의 뜻과 상관없이 이미 ‘차기’를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돌입한 느낌이다. 올 정기국회만 끝나면 본격적인 ‘대선 정국’으로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YS가 요즘은 대세를 읽지 못하고 있지만, 순간적으로 정치의 맥을 짚는 솜씨만큼은 녹슬지 않은 것 같다. 정치는 타이밍인데, YS는 어떤 발언을 언제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순전히 본능적인 감이랄까. YS는 이 발언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도 경고를 보내는 등의 성과를 노리고 있다.”
이 인사의 분석은 어떤 의미일까. 김대통령은 차기 대통령 후보의 가시화 시점을 2002년 1월(민주당 전당대회 시점)로 잡고 있다. 김대통령은 8·30 민주당 전당대회와 관련해 “이번 전당대회는 대권, 당권과 관계없다”고 말했고, 지난 8월31일에는 “차기에 대한 논의는 각 정당의 후보 경선대회가 임박할 때쯤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YS를 비롯한 전임 대통령들이 그랬듯 김대통령 역시 후계구도 확정시기를 최대한 늦추려는 것.
그러나 차기 대권주자 가시화 시점을 늦추고, 당내에서도 이와 관련한 움직임을 억제하려는 김대통령의 의도는 전당대회 이후 이인제 최고위원을 필두로 최고위원들이 활달한 행보를 보이면서 사실상 흐려진 측면이 있다. 그러던 차에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고, 김대통령의 당에 대한 장악력이 다시 높아지면서 예비주자들 역시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최고위원들 차기 노린 발빠른 행보
YS의 ‘이인제 발언’은 바로 이런 때에 등장했다. 차기와 관련된 여권의 움직임이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려는 시기에 돌출한 YS 발언은 이인제 최고위원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다른 예비주자들을 강하게 자극했다. 다른 예비주자들은 김대통령 눈치를 보면서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 이는 YS 의도대로 김대통령이 골치가 아파질 수 있는 상황이다.
민주당 김중권 최고위원은 10월17일 전-현직 언론인들의 모임인 ‘좋은이웃 토론모임’(회장 남시욱 전 동아일보 상무) 초청 강연회에서 4년 중임 정-부통령제로의 개헌론을 정식으로 꺼내들었다. 김최고위원은 특히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대통령이 임기를 다하면 부통령이 다음을 승계하는 게 선진 민주국가인데 우리나라는 부통령이 없어 새로운 인물을 기르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 “정당의 주요 기능 중 하나가 인물배양인데 우리 정당은 그렇지 못해 어떤 때는 ‘깜짝 놀랄 만한 후보’가 나오고, 어떤 때는 ‘제3의 후보’ 얘기도 나온다”고 강조했다. 노벨평화상으로 잠잠해지는 듯했던 여권의 ‘대권 후보 조기 가시화론’에 재차 불을 지핀 것.
여권에서 ‘차기 후보 조기 가시화론’이 처음으로 공론화된 것은 10월11일 민주당 재야 출신 모임인 ‘국민정치연구회’(이사장 이재정 의원) 월례토론회에서였다. 이날 초청 인사인 고려대 임혁백 교수(정치학·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는 “(대선 직전에) 무작정 나타나 대통령의 낙점을 받은 걸로 표를 얻을 수 없다”면서 “대권 후보를 지금 가시화해도 늦다”고 강조했다. 특히 임교수는 “(2002년 1월 전당대회를 통해 후보를 선출하면) 1년 만에 가능하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최고위원을 포함한 여권의 대권 예비후보들에게 역할을 맡겨 그들이 성공사례를 만들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정당은 평소 정치인물을 발굴, 국민에게 선보이고 검증해야 한다”는 김중권 의원의 ‘인물 배양`-`검증론’은 원론적 수준인 듯해도 임혁백 교수의 ‘차기 후보 조기 가시화론’을 재차 강조한 측면이 짙다고 보인다. 김근태 최고위원 역시 “당의 인재가 개혁의 기수로 성장하도록 하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후보군을 일찍 가시화시켜 검증하는 단계를 거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김대통령과 청와대의 뜻과 달리 민주당에서 ‘차기 문제’가 자주 거론되는 것은 아직 뚜렷한 ‘이회창 대항마’가 부각돼 있지 않은 당내 사정 때문이다. 한 당직자는 “인위적으로 누른다고 해서 눌러질 수 없는 것이 후보 조기 가시화론”이라며 “정권 재창출에 대한 확신이 옅어질수록 ‘확정된 후보’를 기대하는 마음이 커질 것”이라고 진단한다. “옛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미국의 부시 행정부 등 내정에 실패한 정권은 모두 재집권에 실패했다”는 임혁백 교수의 강조처럼 요즘 여권 인사들에게는 내치의 불안정성이 재집권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차기를 염두에 둔 인사들의 행보가 점차 빨라지는 것도 후보 확정 시기와 재집권의 불안감이라는 묘한 길항관계에서 출발한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40대 돌풍’을 일으킨 정동영 최고위원은 10월18일 고려대 경영대학원, 21일 건국대, 11월 초 부산 외대 초청 강연회 등 전국을 도는 ‘특강 정치’를 계속 진행중이다. 10월 초에는 부산지역 원외지구당 위원장 세미나에도 참석하고 제주대에서도 특강을 했다. 정위원측은 “영남권에 확실한 교두보를 구축하지 못하면 재집권이 어렵기 때문에 당 차원의 지지기반 확대를 위해 영남권을 자주 찾는다”고 말하고 있으나 ‘당 차원’만의 강연은 아닌 듯하다.
정위원은 고려대 특강에서 YS에 대해 “요즘 같은 지방화시대에 고향에 내려가 후진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내는 국가 원로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YS 낙향론’을 주장했다. 정위원의 이날 발언은 민주당 최고위원들이 아무도 YS에 대해 정면으로 공박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나온 일종의 ‘차별화 전략’으로 비친다.
정대철 최고위원 역시 11일 ‘팍스코리아 21’ 주최 조찬 포럼에 참석하는 것으로 강연 정치를 재개했다. 정위원은 31일 경상대, 11월2일 예산 산업대, 11월9일 부산 동아대 등 거의 매주 전국을 누비는 스케줄을 짜놓고 있다. 정위원은 대권 도전 여부에 대해 “개인적으로 야심이 있다”고 솔직히 인정하면서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선 국민의 지지, 당원의 선출, 본인의 자질 등 3박자가 맞아야 한다”고 전제 조건을 달았다.
이처럼 이인제 김중권 정동영 정대철 등 최고위원들의 ‘차기 행보’가 빨라지는 가운데 한화갑 최고위원만이 침묵을 지키며 ‘해외’에 주력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한위원은 9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국제정당회의와 로스앤젤레스 한인회 주최 ‘한국의 날’ 행사에 잇따라 참석한 데 이어, 10월22일 다시 4박5일 일정으로 방미했다. 한위원은 헤리티지 재단, 브루킹스 연구소, 조지타운 대학 등 세 곳에서 한반도 문제 관련 특강을 한다. 한위원은 당분간 가급적 국내 현안에 거리를 둔 채 ‘국제적 비중’을 높이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최고위원들의 다양한 행보를 보면 여권은 김대통령의 뜻과 상관없이 이미 ‘차기’를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돌입한 느낌이다. 올 정기국회만 끝나면 본격적인 ‘대선 정국’으로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