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목마 속의 이란 핵폭탄. 말이 고삐를 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 뒤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웃고 있다. 2월 15일 독일 쾰른 카니발에 등장한 조형물.
잘 알려진 바처럼 미국은 1979년 시아파 성직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지도자로 한 이슬람 혁명(이른바 호메이니 혁명) 후 이란과의 외교관계를 끊었다.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는 정치변혁으로 인해 미국이 40%의 지분을 지녔던 이란 석유 이권(미국 40%, 영국 40%, 팔레비 왕조 20%)을 잃은 것이 미-이란 외교관계 악화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9·11테러 뒤인 2002년부터 이란을 북한, 시리아와 함께 ‘악의 축’으로 꼽았고, 그러한 인식은 오바마 행정부 들어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미국은 이란과 시리아, 레바논 헤즈볼라를 ‘중동의 문제아’로 여긴다. 특히 이란이 ‘평화적인 핵에너지 개발’을 구실 삼아 북한처럼 핵무기를 개발하려 한다고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테헤란의 속 타는 투자컨설턴트
돌이켜보면, 지난 30년 동안 미국은 마찬가지로 이란과 불편한 관계인 영국과 손잡고 이란을 전방위로 압박했다. 이란에 대한 투자와 교역을 제한하는 경제제재 정책을 폈고, 이 때문에 이란은 글로벌 차원에서 사회경제적 발전에 큰 어려움을 겪어왔다. 특히 이란에 대한 투자 제한이 이란 경제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 이란 현지 취재 때 테헤란의 한 투자자문회사 간부를 만났다. 영국 변호사 자격증을 지닌 40대 초반의 그 간부는 지적재산권 업무와 더불어 이란에 대한 외국인 투자 컨설턴트로 뛰고 있었다. 그는 차 한 잔을 내놓자마자 ‘이란에 대한 한국의 투자 기회’ 설명으로 열을 올렸다. “한국의 삼성그룹이나 LG그룹 같은 큰 기업이 이란에 투자한다면, 다른 데 투자하는 것보다 훨씬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미국과의 긴장관계에서 오는 위험부담은 오히려 기회로 작용한다.”
그가 얼마나 한국의 투자를 바라는지는 진지한 얼굴 표정에서 그대로 묻어났다. 다른 취재 약속이 있다고 일어서려는데도 차 한 잔 더 마시고 가라며 손목을 붙들었다.
아마 요즈음 그 투자자문회사 간부는 속이 더 타들어갈 것이다. 지난 6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이하 유엔안보리)에서 제4차 이란 제재 결의안(1929호)이 통과된 뒤, 이란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 수준이 더욱 강화됐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누구도 마음 편히 그 투자 컨설턴트의 말에 귀 기울이지 못할 것이다.
논란의 핵심은 알려진 것처럼 이란의 핵개발 의혹이다. 이란은 “석유가 유한한 자원인 만큼 대체에너지로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하려 한다”고 하지만, 미국은 이란이 북한처럼 우라늄으로 핵무기를 만들 것이라 의심한다. 유엔안보리 제재 결의안은 이런 사정에서 나온 국제사회의 압력수단이다. 결의안에는 △해외에 있는 이란 은행들에 대한 제재 △중앙은행을 포함한 모든 이란 은행의 거래 감시 △이란에 대한 유엔 무기금수 조치 연장 △이란에 전차 등 중무기 판매금지, 탄도미사일 관련 기술지원 금지 △이란으로 금지대상 물품을 운송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선박에 대한 공해상 조사와 해당 물품 압류조치 등이 포함돼 있다.
“시장 잃을 것” 이란 초강경
미국은 대이란 제재 결의안을 우방국들이 엄격히 지켜주기를 바란다. 문제는 한국도 이란 제재와 관련해 미국의 강력한 주문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과 이란의 30년 갈등 불똥이 한반도로 튄 셈이다. 로버트 아인혼 미 국무부 북한·이란 제재담당 조정관은 한국 정부의 동참을 촉구하며 “이란 제재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기업은 미국과의 경제관계에서 악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와 관련, 미국은 이란에 대한 금융제재의 하나로 이란 멜라트은행 서울지점의 자산동결 혹은 폐쇄를 요청했고, 금융감독원이 최근 멜라트은행 서울지점 현지 실사에 나섰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압력을 받고 있다는 사정을 잘 아는 이란도 초강수의 메시지를 띄웠다. 모하마드 레자 라히미 부통령은 8월 9일 이란 교육부 관리들과 만난 자리에서 “일부 국가가 이란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도시 전체에 광고를 하면서도 미국 주도의 이란 제재에 동참한다. 만일 한국이 이란 제재에 동참하면 이란에서 한국 제품이 팔릴 수 없게 강력 조처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한국 제품에 200%까지 높은 관세를 매겨 이란 시장에서 한국산의 경쟁력을 잃게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모하마드 레자 바크티아리 주한 이란대사도 나섰다. 그는 국내 언론과 잇따라 만나 “어떤 나라가 이란에 제재를 가하면 이란은 두 손 놓고 있지 않을 것이고, 만일 한국이 제재를 가한다면 한국의 기업들이 이란 시장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문제는 미국의 요청도 무시하기 어렵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이란과의 경제관계도 간단치 않다는 것이다. 이란은 한 해 교역규모가 100억 달러에 이르는 중동지역 최대 교역국이다. 한국은 세계 2위의 석유 매장량(1위 사우디아라비아, 3위 이라크)을 지닌 이란으로부터 해마다 전체 원유수입량의 10%가량을 들여온다(2009년은 9.5%, 47억 달러). 만에 하나 중동 정치불안이나 한국-이란 관계 악화로 이란산 원유 도입에 차질이 생긴다면, 국내 유가는 요동칠 것이고 경제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것임은 뻔한 얘기다. 석유뿐 아니다. 한국의 대이란 수출은 자동차, 가전, 중소기업 제품 등 40억 달러 규모다. 전체 수출 규모에서 이란이 차지하는 비중은 1%쯤이지만, 거기에 목을 맨 관련 중소기업이 무려 2100개가 넘는다.
미국이 대이란 경제 제재에 한국의 동참을 요구한 뒤 긴장감이 흐르는 이란 멜라트은행 서울지점.
이번 유엔안보리 제재 결의안에 따르면, 모든 유엔 회원국은 결의안 통과 60일 이내에 제재 이행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돼 있다. 한국 정부는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안보리 제재 결의를 성실히 수행한다’는 내용의 의례적인 문건을 8월 초 제출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이란을 어떻게 제재하느냐는 밝혀진 게 없다. 주변국인 일본, 중국도 서로 눈치를 보고 있다. 미국 정부는 대이란 제재의 내용을 담은 시행 세칙을 10월 초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함께 가자고 강력 주문하고, 이란도 나름대로 경고장을 보내올 경우다. 만에 하나 핵개발 의혹을 받는 이란이 북한으로부터 핵기술을 이전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한국의 대이란 제재 명분이 선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이란-북한 핵 커넥션이 논란의 중심에 설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미국과 이란을 동시에 만족시킬 묘수도 없어 보인다.
미-이란 양쪽 만족시킬 묘수는?
현재 정부는 외교통상부, 지식경제부 등 관계부처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국내 경제와 기업들의 피해를 줄이는 묘수를 마련 중이다. 한미동맹도 중요하지만 이란과의 관계도 매우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한국 정부의 선택기준은 당연히 국가이익이 돼야 한다. 세계 2위의 석유대국 이란과의 좋은 관계는 한국이 절실하게 바라는 유가 안정과도 맞물려 있다. 미국이 앞장선 대이란 압박대열에 한국이 줄을 선다면 단기적으로나 중장기적으로 한국의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어떤 형태로든 이롭지 못한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딱 한 가지 바늘 구멍 같은 돌파구가 있긴 하다. 미-이란 갈등의 중심인 핵개발문제가 극적으로 타결되는 경우다. 테헤란 국제정치문제연구소(IPIS) 부설 아시아연구센터의 잘랄 칼란타리 소장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지난 30년 동안 ‘전쟁의 언어’로 이란을 상대해왔다. 부시 행정부 때는 ‘악의 축’이라고까지 막말을 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그런 전쟁의 언어를 버리고 ‘평화의 언어’로 이란을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미-이란 관계 개선을 바라는 마음을 내비쳤다.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란은 북한과 닮았다. 미국도 경제제재라는 압박카드와 더불어 유화적 메시지를 이란에 보내고 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검증할 수 있는 조치들을 취하면, (이란이 주장하는) ‘비군사용 핵개발’을 허용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단기적으로 미-이란 관계의 돌파구가 열릴 가능성은 매우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