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8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개각을 발표하는 홍상표 홍보수석.
국무총리 교체 외에 16개 부처 장관 중 7명이 바뀌었고, 장관급인 국무총리실장과 중앙노동위원장까지 포함하면 9명의 장관이 새 얼굴이다. 수치로만 따지면 ‘중폭 수준’. 하지만 ‘대과가 없으면 바꾸지 않는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을 고려하면 ‘대폭 개각’이다. 취임 이후 최대 규모의 개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은 왜 이 시점에서 대폭 개각을 단행했을까.
국내 언론은 ‘촌놈’으로 불릴 만큼 서민의 애환을 잘 안다는 김태호 내정자와 23년간 같은 단독주택에 살면서 친서민을 몸소 실천한 이재오 내정자의 ‘깜짝 앙상블’은 이 대통령 집권 후반기에 ‘친서민 정책기조 강화’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재오의 복귀, 이주호·신재민 차관의 장관 내정, 이현동 국세청장 내정 등으로 친정체제를 강화했다는 분석과 함께.
부처 장관 7명을 바꾸는데 현역(3명)·전직 의원(2명)이 다수이고, 이미 정치인 출신의 임태희 대통령실장과 정진석 정무수석을 발탁한 것은 ‘여의도와의 거리 좁히기’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6·2지방선거 패배 이후 제기된 국정쇄신 요구에 부응하고 분위기를 일신해 집권 후반기 국정운영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려는 포석으로 볼 수도 있다.
김태호 깜짝 발탁으로 레임덕 차단
하지만 여권 내 유력 친이계 대권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39년 만의 ‘40대 총리’ 발탁과 ‘지역구 활동’을 강조한 이재오 의원을 불러들인 대목에선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예측이 전혀 안 된다”고 비판한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반응도 같은 맥락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5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올 하반기부터 2011년까지는 선거가 없는 해이기 때문에 1년 반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기간’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개각의 결과는 친정체제 강화와 정치인의 대거 입각이었다. ‘뒤집어보면 그만큼 앞으로 풀어가야 할 정치적 사안이 많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선거가 없어 일하기 가장 좋은 시기’라고 말했지만, 2011년은 가장 ‘정치적인 해’가 될 것이다. 2012년 4월 총선과 8월 대통령후보 경선 시작, 12월 대선이라는 여권의 정치 레이스를 고려하면 당장 내년부터 대권 잠룡(潛龍)들이 본격 부각될 것이고, 정치인들의 줄서기도 시작될 것이다. (이 대통령은) 그걸 알기 때문에 김태호, 이재오를 불러들인 것이다. 민생 개각보다는 정치 개각으로 볼 수 있다.”
여권 한 핵심 관계자의 분석처럼 내년은 여권 내 잠룡들의 용틀임이 시작되는 민감한 시기. 총선 공천권 행사 역시 유력 대권후보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점을 감안하면 2011년은 여느 해보다 정치권의 불안정성이 높아진다.
이러한 프레임을 놓고 보면, 이번 개각은 지방선거 패배 후 대통령 레임덕이 있을 시점에 국민의 시선을 ‘젊은 총리’에게로 돌리면서 정치권 지각변동에 선제적으로 대비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국민의 시선을 40대 총리에 모으면서 친정체제를 구축하고, 충성을 다한 사람들에게 ‘보은 숙제’까지 해결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중 김태호라는 인물이 아니라 40대 총리 발탁으로 이 대통령이 ‘차기 화두’를 던졌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사진 왼쪽부터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김태호 신임 국무총리 내정자.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차차기 대권주자 명단에 올랐던 김 총리 내정자는 이번 개각을 통해 일약 차기 후보군으로 급부상했고, 동시에 국민에게 ‘세대교체’라는 신선함을 안겨줬다. 만약 ‘젊은 총리’가 원활한 업무수행으로 세대교체 바람을 일으킨다면 ‘박근혜 대항마’로 도약할 수 있다. 반대의 경우 언제든 거품은 꺼질 수 있다. 하지만 이 대통령과 친이계로선 ‘반대의 경우’라도 남는 장사가 된다.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경윤호 객원교수의 설명이다.
“김 내정자가 총리직을 훌륭히 수행하면 국민의 뇌리에 ‘세대교체 신드롬’을 심어줄 수 있다. 일을 못한다 해도 보수혁신, 혹은 한국사회의 미래 어젠다를 선점하는 젊은 대권주자들이 전면에 나서는 계기와 분위기는 마련된다. 그렇게 되면 박 전 대표에게 다양한 견제구가 날아들어 대선 레이스 독주체제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후반기 정국 ‘코디네이터’ 이재오
이 대통령과 친이계로서는 ‘절대 강자’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레임덕을 방지하는, 1997년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 대선경선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당시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이회창이라는 강력한 대권후보는 제쳐두고 ‘9룡’의 무한경쟁을 부추기며 자신의 가치를 살려갔다.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 이철희 부소장의 분석도 비슷하다.
“청와대가 김태호 지명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보진 않는다. 개각의 핵심은 여권 내 대선 다자구도를 만드는 것이다. 다자구도가 형성되면 상대적으로 집권 후반기의 대통령 힘은 커지게 마련이고, 동시에 박 전 대표는 대권후보 가운데 ‘여럿 중 하나(One of them)’가 돼 그 위상은 떨어진다. 친이계로선 나쁠 게 없다.”
다만 1997년 경선 당시 ‘킹메이커’ 김윤환 전 의원이 이회창 후보와 손을 잡으면서 9룡의 무한경쟁도 막을 내렸지만, 현재는 그러한 ‘킹메이커’가 없다는 게 그때와 다르다. 이쯤 되면 ‘정권 2인자’ 이재오 의원의 특임장관 기용에 눈길이 간다. 그동안 변방을 맴돌던 이 내정자는 명실상부한 여권 중심으로 급부상하면서 향후 대권 레이스에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형님’(이상득 의원)의 움직임에 제약이 많은 현실에서, 이 내정자는 이명박 정부 집권 후반기 정국의 코디네이션을 맡아야 한다. 정치권에선 잠룡들의 합종연횡 등 대권구도의 메인스트림이 형성되기 전 이 내정자의 활약이 주요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이 내정자를 두고 ‘킹’ 후보냐 ‘킹메이커’냐 시각이 엇갈리지만, 이 내정자 자신은 ‘킹’에 대한 의욕이 앞선다는 게 지인들의 전언. “특임장관실을 이 내정자의 대선후보 캠프로 만들겠다고 한다” “이번 개각은 이 내정자가 강하게 요구했다”는 얘기가 나도는 것도 이 때문. 문제는 대선주자로서 주변의 객관적인 평가와 이 내정자의 주관적 의욕이 극단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킹’이 되고자 한다면 나이(65세)를 감안할 때 사실상 다음 대선이 마지막이다. 그렇다면 특임장관으로서 국민에게 강한 이미지를 남겨야 한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견제와 균형’ 주연배우는 누구?
“특임장관으로서 극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면서 새로운 어젠다를 만들어낼 수 있다. 북한도 김정은 세습을 위해 원활한 남북관계와 원조를 원한다. 유리한 대선구도와 정국주도권을 생각하면 이 대통령과 친이계에서도 남는 장사다. 이 내정자나 다른 대권후보가 이 과정에서 급부상할 수 있다. 드라마틱한 요소가 전제되면 흥행은 오래간다. 물론 개헌 카드도 아직 유효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이재오 내정자를 ‘믿지 못하는’ 박 전 대표의 대응 발걸음도 빨라질 수밖에 없다. 박 전 대표 처지에선 좋든 싫든 내년 한 해는 ‘대통령으로 가는 치열한 전초전’을 펼쳐야 한다. 한 친박계 관계자는 “예상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년에는 대통령이 개각으로 정국을 흔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재오 의원을 서둘러 끌어들인 것 아닌가. 박 전 대표는 이 대통령 당선 이후 ‘집권 전반기에는 가만있겠다’고 말한 바 있다. 내년은 다르다. 박 전 대표는 대외활동이나 정국 현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면서 움직일 것이다. 내년 하반기부터 2012년 총선 공천작업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상반기부터 ‘스타트’해야 한다. 이번 개각으로 그 일정이 앞당겨질 듯하다.”
결국 ‘청와대의 대외명분’보다는 향후 정국 운용과 맞물리면서 8·8개각은 이 대통령의 ‘체크 앤드 밸런스(견제와 균형)’와 ‘정치적 개각’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투자·배급 MB, 연출 이재오, 카메오 김태호’인 상황에서 주연배우는 확정되지 않은 채 이미 ‘8·8개각 시네마’는 상영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