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4일 테오 알브레히트가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독일 최고의 갑부이며 지난 50여 년간 전무후무한 ‘알디 신화’를 일궈낸 형제 중 한 사람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 알디(ALDI)는 독일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인기 많은 저가 슈퍼마켓이다. 창업자이자 소유주인 카를 알브레히트와 테오 알브레히트 형제는 각각 남부 알디와 북부 알디를 경영했는데 현재 독일 내 점포 수가 각각 1760개와 2545개, 해외 점포 수는 1770개와 2699개로 지난해 시장점유율이 22%와 19%에 이른다. 둘의 한 해 매출액은 총 290억 유로(약 43조 원)다. ‘포브스’지의 2010년 발표에 따르면 형인 카를은 235억 달러, 동생인 테오는 167억 달러의 재산을 보유해 세계 최고 부자 순위 10위와 31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들의 시작은 미미했다. 탄광노동자였던 아버지가 진폐증으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자 어머니는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1913년 에센 시내에 33m2(10평) 규모, 식료품 위주의 단출한 가게를 열었다. 1946년 카를과 테오는 이 가게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사업은 날로 번창했고, 1960년 디스카운트 체인점인 ‘알디’가 탄생했다. ‘알브레히트 형제의 디스카운트 스토어’라는 뜻에서 ‘알디’란 명칭이 나왔다. 이후 알디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불과 50여 년 만에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에 수천 개의 점포를 거느린 거대 재벌기업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주식회사가 아닌 유한회사 형태로 남아 있어, 실질적으로 알브레히트 가족의 개인 재산이나 다름없다.
카를과 테오 형제는 1960년대 남부 알디와 북부 알디로 회사를 나눴다. 형제의 기업경영 방식에 작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 형인 카를보다 동생 테오가 매사에 더 조심스러운 편이었다. 예컨대 담배 같은 기호품과 냉장·냉동식품을 판매하는 것에 형은 적극적이었지만 동생은 회의적이었다. 식품을 냉장·냉동하는 것은 시설 설치비와 전기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 남북 알디 모두 점포의 토지 및 건물 부동산을 직접 소유하지, 결코 임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업 확장용으로 부동산을 매입하는 데 남의 돈을 빌리는 것을 형은 꺼리지 않았는데, 동생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 두 사람이 공유한 한 가지 운영원칙이 있었는데, ‘최고 품질의 상품을 가장 저렴하게 판매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박리다매(薄利多賣) 전략이다. 알디의 눈부신 성공사례를 분석해볼 때, 그들이 성공한 배경에는 충실한 운영원칙 준수가 있다. 이 원칙이 알디에서는 뺄셈으로 구현됐다. 지금은 조금 완화됐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모든 알디 점포에는 다음과 같은 운영원칙이 지켜졌다.
박리다매로 1품목 1상품 판매
△판매 품목을 식료품, 가정용품 합쳐 500여 가지로 한정하되, 동일 품목의 여러 상품을 판매하지 않을 것(어떤 대형 상점은 약 6만 개의 상품을 판매하면서 치약 하나만 해도 100여 가지 상품을 진열한 반면, 알디는 원칙적으로 한 품목에 한 가지 상품만 판매한다) △유명 메이커 상품을 배제할 것(품목 중 95% 정도가 알디 자체 상표) △신선도 유지가 필요한 상품은 되도록 배제할 것(초기엔 냉장·냉동식품을 취급하지 않았지만 조금씩 이 항목이 완화돼 2004년 이후엔 포장고기를 판매한다) △상품 하나하나에 가격표를 붙이는 행위는 배제할 것(일손을 줄이기 위해서. 대신 계산원이 모든 상품 가격을 외워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는데 이 역시 판매 상품이 500여 개에 그쳤기에 가능했다. 2000년 이후로는 알디에서도 바코드 스캔 방식을 도입했다) △직원은 상품이 담긴 상자를 뜯는 일까지만 하고, 상자에서 물건을 꺼내기는 고객이 하도록 할 것 △우아한 상품진열대 같은 것 없이 단지 나무 궤짝에 물건 상자를 놓을 것 △가게 인테리어나 광고를 위해 지출하지 않을 것 등이다. 이 밖에 각 점포의 직원 수를 5명 정도로 제한하고 전 직원이 수납, 매장 청소 등 모든 업무를 하게 한 것도 인건비 절감의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알디에는 노조가 없다.
이처럼 노력한 결과 알디는 독일 내 어떤 상점보다 저렴한 가격에 양질의 상품을 제공할 수 있었다. 덕분에 알디의 상품 대부분이 유명 메이커가 아닌 자체 상표를 단 것이지만, 독일 정부가 시행하는 상품 테스트에서 대부분 평균 이상의 등급을 받는다. 북(北)알디에서는 웬만한 상품은 시세의 절반 수준으로 판매되며, 남(南)알디에서는 가격이 평균 시세의 80% 정도까지 올라오지만 품질이 월등해 소비자들의 만족도가 높다. 어느덧 독일인에게는 ‘알디에서 쇼핑하면 결코 잘못 사지 않는다’는 믿음 같은 것이 생겼다.
물론 1970~80년대엔 ‘알디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라는 싸구려 이미지가 있었다. 그래서 알디를 이용하고 쇼핑백은 다른 비싼 슈퍼마켓의 것을 이용하는 우스꽝스러운 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워낙 좋고, 사회 명사들도 방송이나 신문, 잡지 등에서 알디 예찬을 공공연히 하기에 이런 우스운 일은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
알디에서 상시 판매하는 주 종목은 식료품, 가정용품에 국한되지만, 1990년대부터는 옷이나 신발, 학용품, 가구 등도 매주 특별기획 상품 형태로 나온다. 특히 1995년에 있었던 ‘알디 컴퓨터’ 열풍은 독일 역사에 기록할 만한 사건이다. 당시만 해도 고급 이미지가 강했던 컴퓨터가 감자와 양파를 팔던 슈퍼마켓에, 그것도 시세의 절반 가격으로 나왔다는 사실에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알디 컴퓨터는 판매 몇 시간 만에 동이 났고, 몇몇 지점에서는 경찰까지 불러야 했다. 마지막 남은 컴퓨터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주먹다툼을 벌였기 때문. 알디 컴퓨터의 성능도 유명 메이커 컴퓨터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알디에 컴퓨터를 납품한, 당시까지만 해도 무명이던 회사 ‘메디온’은 하룻밤 사이에 유명세를 얻었고, 독일 내 컴퓨터 판매순위 3위까지 올랐다.
이후 다른 업체들도 일부 기획상품의 가격을 알디 수준으로 낮게 책정하기 시작했다. 특히 거대 가전제품 판매업체인 ‘자툰’이 2003년 들고 나온 ‘구두쇠 정신은 좋은 것’이란 구호는 알디의 경영철학이 얼마나 독일 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준 증거다. 카를과 테오 형제는 검약이 몸에 밴 독일 사람들의 소비심리를 누구보다 빨리 파악해 성공했고, 이젠 알디를 모방하는 업체들을 통해 ‘구두쇠 정신’이 확산일로에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업체 간 가격경쟁이 치열해지고, 새로운 고부가가치 영역에 대한 투자가 위축된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수십 년간 철저히 언론 기피
테오 알브레히트의 부고는 조촐한 가족장이 치러진 뒤에야 언론에 알려졌다. 알디 측에서 주요 언론사에 팩스를 보낸 것. 사안은 매우 중요한 뉴스거리였지만 한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알디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언론을 기피했기 때문. 거기엔 1971년에 있었던 테오의 납치사건이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그해 11월 29일 혼자 차를 몰고 귀가하던 테오를 두 명의 괴한이 납치했다. 그들은 몸값 700만 마르크를 요구했으며, 돈이 전달된 뒤에야 테오는 풀려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사람들은 낡은 기성복만 입고 다니던 저가 슈퍼마켓의 주인이 실상은 억만장자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알디 가족은 또 다른 범죄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일절 대외활동을 피했다. 파파라치의 도둑 촬영 외에 이 형제가 제대로 찍힌 사진은 1971년 것이 유일하다.
지난 2월 독일 언론에는 형인 ‘카를 알브레히트가 90세 생일을 맞았을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떴다. 그의 출생이 1920년 2월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는지 여부조차 언론이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결국 테오의 부음을 알린 팩스는 알디가 언론에 보낸, 회사 역사상 가장 긴 공문인 셈. 이로써 지난 50여 년간 사업 성공을 거두면서도 침묵과 고독 속에 숨어 지냈던 알디의 한 세대가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이들의 시작은 미미했다. 탄광노동자였던 아버지가 진폐증으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자 어머니는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1913년 에센 시내에 33m2(10평) 규모, 식료품 위주의 단출한 가게를 열었다. 1946년 카를과 테오는 이 가게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사업은 날로 번창했고, 1960년 디스카운트 체인점인 ‘알디’가 탄생했다. ‘알브레히트 형제의 디스카운트 스토어’라는 뜻에서 ‘알디’란 명칭이 나왔다. 이후 알디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불과 50여 년 만에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에 수천 개의 점포를 거느린 거대 재벌기업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주식회사가 아닌 유한회사 형태로 남아 있어, 실질적으로 알브레히트 가족의 개인 재산이나 다름없다.
카를과 테오 형제는 1960년대 남부 알디와 북부 알디로 회사를 나눴다. 형제의 기업경영 방식에 작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 형인 카를보다 동생 테오가 매사에 더 조심스러운 편이었다. 예컨대 담배 같은 기호품과 냉장·냉동식품을 판매하는 것에 형은 적극적이었지만 동생은 회의적이었다. 식품을 냉장·냉동하는 것은 시설 설치비와 전기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 남북 알디 모두 점포의 토지 및 건물 부동산을 직접 소유하지, 결코 임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업 확장용으로 부동산을 매입하는 데 남의 돈을 빌리는 것을 형은 꺼리지 않았는데, 동생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 두 사람이 공유한 한 가지 운영원칙이 있었는데, ‘최고 품질의 상품을 가장 저렴하게 판매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박리다매(薄利多賣) 전략이다. 알디의 눈부신 성공사례를 분석해볼 때, 그들이 성공한 배경에는 충실한 운영원칙 준수가 있다. 이 원칙이 알디에서는 뺄셈으로 구현됐다. 지금은 조금 완화됐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모든 알디 점포에는 다음과 같은 운영원칙이 지켜졌다.
박리다매로 1품목 1상품 판매
△판매 품목을 식료품, 가정용품 합쳐 500여 가지로 한정하되, 동일 품목의 여러 상품을 판매하지 않을 것(어떤 대형 상점은 약 6만 개의 상품을 판매하면서 치약 하나만 해도 100여 가지 상품을 진열한 반면, 알디는 원칙적으로 한 품목에 한 가지 상품만 판매한다) △유명 메이커 상품을 배제할 것(품목 중 95% 정도가 알디 자체 상표) △신선도 유지가 필요한 상품은 되도록 배제할 것(초기엔 냉장·냉동식품을 취급하지 않았지만 조금씩 이 항목이 완화돼 2004년 이후엔 포장고기를 판매한다) △상품 하나하나에 가격표를 붙이는 행위는 배제할 것(일손을 줄이기 위해서. 대신 계산원이 모든 상품 가격을 외워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는데 이 역시 판매 상품이 500여 개에 그쳤기에 가능했다. 2000년 이후로는 알디에서도 바코드 스캔 방식을 도입했다) △직원은 상품이 담긴 상자를 뜯는 일까지만 하고, 상자에서 물건을 꺼내기는 고객이 하도록 할 것 △우아한 상품진열대 같은 것 없이 단지 나무 궤짝에 물건 상자를 놓을 것 △가게 인테리어나 광고를 위해 지출하지 않을 것 등이다. 이 밖에 각 점포의 직원 수를 5명 정도로 제한하고 전 직원이 수납, 매장 청소 등 모든 업무를 하게 한 것도 인건비 절감의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알디에는 노조가 없다.
‘알디’에서는 판매품목을 500여 가지로 한정하고, 동일 품목은 여러 상품을 판매하지 않는다.
물론 1970~80년대엔 ‘알디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라는 싸구려 이미지가 있었다. 그래서 알디를 이용하고 쇼핑백은 다른 비싼 슈퍼마켓의 것을 이용하는 우스꽝스러운 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워낙 좋고, 사회 명사들도 방송이나 신문, 잡지 등에서 알디 예찬을 공공연히 하기에 이런 우스운 일은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
알디에서 상시 판매하는 주 종목은 식료품, 가정용품에 국한되지만, 1990년대부터는 옷이나 신발, 학용품, 가구 등도 매주 특별기획 상품 형태로 나온다. 특히 1995년에 있었던 ‘알디 컴퓨터’ 열풍은 독일 역사에 기록할 만한 사건이다. 당시만 해도 고급 이미지가 강했던 컴퓨터가 감자와 양파를 팔던 슈퍼마켓에, 그것도 시세의 절반 가격으로 나왔다는 사실에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알디 컴퓨터는 판매 몇 시간 만에 동이 났고, 몇몇 지점에서는 경찰까지 불러야 했다. 마지막 남은 컴퓨터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주먹다툼을 벌였기 때문. 알디 컴퓨터의 성능도 유명 메이커 컴퓨터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알디에 컴퓨터를 납품한, 당시까지만 해도 무명이던 회사 ‘메디온’은 하룻밤 사이에 유명세를 얻었고, 독일 내 컴퓨터 판매순위 3위까지 올랐다.
이후 다른 업체들도 일부 기획상품의 가격을 알디 수준으로 낮게 책정하기 시작했다. 특히 거대 가전제품 판매업체인 ‘자툰’이 2003년 들고 나온 ‘구두쇠 정신은 좋은 것’이란 구호는 알디의 경영철학이 얼마나 독일 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준 증거다. 카를과 테오 형제는 검약이 몸에 밴 독일 사람들의 소비심리를 누구보다 빨리 파악해 성공했고, 이젠 알디를 모방하는 업체들을 통해 ‘구두쇠 정신’이 확산일로에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업체 간 가격경쟁이 치열해지고, 새로운 고부가가치 영역에 대한 투자가 위축된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수십 년간 철저히 언론 기피
테오 알브레히트의 부고는 조촐한 가족장이 치러진 뒤에야 언론에 알려졌다. 알디 측에서 주요 언론사에 팩스를 보낸 것. 사안은 매우 중요한 뉴스거리였지만 한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알디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언론을 기피했기 때문. 거기엔 1971년에 있었던 테오의 납치사건이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그해 11월 29일 혼자 차를 몰고 귀가하던 테오를 두 명의 괴한이 납치했다. 그들은 몸값 700만 마르크를 요구했으며, 돈이 전달된 뒤에야 테오는 풀려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사람들은 낡은 기성복만 입고 다니던 저가 슈퍼마켓의 주인이 실상은 억만장자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알디 가족은 또 다른 범죄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일절 대외활동을 피했다. 파파라치의 도둑 촬영 외에 이 형제가 제대로 찍힌 사진은 1971년 것이 유일하다.
지난 2월 독일 언론에는 형인 ‘카를 알브레히트가 90세 생일을 맞았을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떴다. 그의 출생이 1920년 2월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는지 여부조차 언론이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결국 테오의 부음을 알린 팩스는 알디가 언론에 보낸, 회사 역사상 가장 긴 공문인 셈. 이로써 지난 50여 년간 사업 성공을 거두면서도 침묵과 고독 속에 숨어 지냈던 알디의 한 세대가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