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북한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2월11일 저녁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김 부상은 “6자회담 재개와 평화협정 체결, 조·중 문제 등을 놓고 중국 측과 깊이 있는 의견을 교환했다”고 밝혔다.
“북한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6자회담이) 열리는 것은 틀림없다고 본다.”(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2월17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처지가 상당히 다르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북한을 관찰해온 두 인사의 최근 북한 읽기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북한이 남한과 미국 등 국제사회와의 관계를 풀려 한다고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원인이 북한 내부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른바 ‘북한 대외정책의 내부요인론’인 셈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 2009년 미국 버락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의 대외 공세를 설명하는 틀이 이제는 대외 유화정책을 설명하는 관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제법 많은 사람한테서 공감받는 이 관점은, 2010년 새해가 밝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여온 북한의 대외적 행보와 지난해 11월30일 전격적으로 단행한 화폐개혁의 부작용으로 복잡한 내부 동향에 근거를 두고 있다.
북한 대외정책 ‘내부요인론’
우선 미국을 향한 북한의 구애공세는 애처로울 정도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방북(2월6~9일)했던 왕자루이(王家瑞)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을 따라 중국에 건너간 뒤, 중국 외교가에서는 돌연 김 부상이 3월 미국에 갈 것이라는 소식이 돌았다. 김 부상의 방미가 이미 결정됐으며, 지난해 11월 스티븐 보즈워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에 이어 두 번째 북-미 직접대화가 열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부 당국자들의 반응은 온도 차이가 컸다. 김 부상이 3월 미국 방문을 추진하는 것은 맞지만 미국이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미국의 학술단체가 초청하는 형식으로 김 부상의 방미를 강하게 추진한다”며 “그러나 미국 정부가 비자를 내주지 않아 성사되지 않고 있다”고 확인했다. 다른 당국자도 “김 부상이 학술단체들의 초청에 응하는 형식으로 미국에 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비자 발급 등을 위해 북미 간 협의가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북한이 중국과 미국 등에 모종의 거래를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선(先)평화협정 체결과 제재 해제를 조건으로 내세우며 6자회담 복귀를 거부했던 자세에서 한발 물러선 것으로, 일단 긍정적인 신호”라고 분석했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이근 외무성 미국국장이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동북아시아협력대화(NEACD) 참석을 명분으로 미국을 방문해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인 성 김 국무부 북핵특사와 접촉,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을 논의했던 당시와 같은 형식으로 김 부상의 방미를 추진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미국 측은 평화협정 체결, 제재 해제 등을 6자회담 복귀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하는 북한의 입장에 변화가 있는지 확인될 때까지 북한의 애를 태우며 김 부상의 방미 결정을 미루었던 것이다.
북한이 지난해 11월30일 화폐개혁에 따라 새로 발행한 화폐.
남북관계에서도 같은 모양새가 연출되고 있다. 북한은 1월1일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남한과의 관계개선을 희망한 뒤 금강산 및 개성관광 재개를 위한 남북 당국 간 실무회담, 개성공단 및 금강산 3통(통행·통신·통관) 문제 해결을 위한 당국 간 실무접촉 등 다양한 만남을 시도했다. 최근에는 북한 나무심기의 대가로 인도적 지원을 바란다는 의향을 전해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정부 당국자들에 따르면, 북한은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가 지난해 12월 출범 후 북한 나무심기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히자 이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소식통들은 16일 “북한의 대남 창구인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올해 초 사회통합위원회 측에 조림사업을 함께 하고 싶다는 의향을 알려왔다”고 전했다.
정부는 그러나 이 사업이 북핵 문제 및 남북관계의 진전과 함께 추진돼야 할 사안이라 판단하고 속도조절에 나서는 한편, 사업 추진 주체도 녹색성장위원회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2월 초 중국을 방문했던 원동연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이 북한 산림녹화 사업을 협의하고자 남측 당국자와의 접촉을 간접적으로 타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역시 급한 것은 북한이었고 남한은 속도조절을 하며 여유를 부린 셈이다.
북한이 이래저래 당국자들의 체면을 구기면서까지 미국, 남한과 대화에 나서야 하는 이유는 역시 그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 때문이다. 북한의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것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지만 지난해 11월30일 단행한 화폐개혁과 외환통제, 시장통제 등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복원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북한 내부에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유통물자 부족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는 소식이 속속 전해진다. 북한 당국의 조급한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급기야 김 위원장이 경제정책 실패를 시인하고, 당과 내각에 주민 동요를 진정시키기 위한 사과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북한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남한과 미국은 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북한이 취할 수 있는 옵션은 두 가지다. 황 비서와 유 장관의 기대처럼 남북회담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고 6자회담에 조건 없이 참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다시 2008년과 2009년 상반기처럼 무력공세로 내부를 진정시키고 국제사회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한 보수적인 대북 전문가는 “북한이 대풍국제그룹 등을 내세워 외자유치에 혈안인 것을 보면 외화 부족 때문에라도 무력공세로 돌아설 가능성은 낮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국제사회의 제재가 북한을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 만큼, 이제는 북한 내부의 불안정성을 관리할 필요성이 커진 시점”이라고 설명한다. 북한의 불안정성을 극대화해서 북한 급변사태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면, 어느 시점에서는 북한의 상황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 유화공세의 내부요인론은 이처럼 한국과 미국의 대북정책 담당자들에게 ‘전략적 무시와 인내’라는 정책의 변화를 추구할 시점이 다가왔다는 점도 시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