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큰 인기를 모았던 시트콤 ‘프렌즈’의 한 장면.
와이프 스와프’의 기본 설정은 간단하다. 전혀 다른 사회•문화적 배경을 지닌 두 가정의 주부가 10일 동안 서로의 가정을 바꿔 살림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다. ABC TV가 처음 생각해낸 참신한 기획은 아니다. 지금 영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같은 제목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와이프 스와프’의 컨셉트를 빌려온 것이다. 영국의 채널4에서 방송되고 있는 ‘와이프 스와프’는 매주 700만명이 넘는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불러모으며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고 있다.
도농 주부 역할 바꾸기 프로그램도
ABC TV의 ‘와이프 스와프’ 제작 소식이 알려진 뒤 폭스 TV도 부랴부랴 비슷한 성격의 프로그램을 방영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제목은 ‘배우자 맞바꾸기: 새엄마를 만나세요(Trading Spouses: Meet Your New Mommy)’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엄마 아빠가 모두 다른 가정으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뻔뻔한 선수치기라는 방송가의 비난이 일었지만 폭스 TV는 이에 아랑곳 않고 7월20일 첫 방송을 내보냈다. 시사회 참가자들은 흥행 대박을 점치고 있다. 주부 아이덴티티 탐구를 내세운 ‘와이프 스와프’로 다시 돌아가서, ABC TV는 자사 인터넷사이트 등을 통해 시청자에게 출연 신청을 받았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선 뉴욕 맨해튼에 사는 부유하고 매력적인 주부와 뉴저지 시골에 사는 노동자 계층의 드센 엄마가 자리를 맞바꾼다. 맨해튼 주부는 하루 일과를 3등분해 헬스센터에서 몸매를 가꾸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매만진 뒤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면서 보내는 엄마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하루 평균 1시간 정도다. 물론 아이 셋을 돌보는 보모를 따로 고용하고 있다. 뉴저지 주부는 학교버스를 운전하고 아르바이트로 장작 패는 일을 한다. 물론 아이들 돌보기와 남편 시중은 손발이 닳도록 그녀가 직접 한다. 두 가정의 남편은 각각 아내에게 별 불만이 없다. 맨해튼 남편은 아내가 매력적이고 각종 모임에 동행할 파트너로 손색이 없기를 바라고, 뉴저지 남편은 자신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동안 아내가 주변을 돌아다니며 흘린 과자를 줍고 잔심부름을 해주기 원한다.
자, 이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두 주부가 새로운 집에 도착한다. 원래 주부의 습관들이 적혀 있는 핸드북을 들고서. 새롭게 떠맡을 가정에 대한 사전정보는 주어지지 않았다. 에피소드의 전반부는 원래 주부가 만들어놓은 집안의 규칙에 적응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주부의 모습에 초점이 맞춰지고, 후반부는 자신의 방식대로 집안을 이끌어가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방문 주부는 요리, 아이 돌보기, 집안 꾸미기 등 거의 모든 살림살이에 손을 댈 수 있다. 물론 부부간 성적 접촉은 허용되지 않는다.
예상치 못했던 다양한 해프닝이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 웃음 속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떠오른다. 어느 계층에 속하건,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관계없이 가정생활의 집안 규칙은 주부가 만들고 가족 구성원이 그걸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주부란 과연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이 시대 주부에 대한 컨센서스가 없다는 것이다. ‘와이프 스와프’는 결과적으로 이 시대 주부상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ABC TV는 ‘와이프 스와프’를 방영하기 사흘 전인 9월26일부터 멜로드라마 연속극 ‘위기의 주부들(Desperate Housewives)’도 방영한다. 한적하고 아늑한 교외 전원도시에 사는 4명의 주부들이 이웃 여자의 갑작스러운 자살 이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겪는 정체성의 갈등을 그린 드라마다. 4명의 여성은 결혼생활이 가져올 수 있는 거의 모든 형태의 비참함을 각각 대표한다. 비서와 눈이 맞은 남편에게 버림받은 정서불안의 이혼녀, 일 때문에 끊임없이 집을 비우는 남편에 다루기 힘든 네 아이를 건사하며 과거 직장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전직 커리어 우먼, 살림에 지나칠 정도의 결벽증을 보여 가족을 숨막히게 하는 전업주부, 그리고 잘난 체하는 남편에 대한 염증으로 정원 일을 해주는 10대 소년과 바람을 피우는 투자전문가가 주인공이다. 내용만 보면 소설에서 많이 읽었던 좀 뻔한 스토리다. 하지만 미국 TV에서 주부들의 얘기를 정면으로 다룬 건 10여년 만의 일이다.
2004년의 새로운 주부상 반영 의도?
1950, 60년대 TV에 나타난 주부들은 대개가 현모양처들이었다. 70, 80년대에는 결혼의 굴레에서 해방된 독신여성이 용기 있게 자신의 목표를 실현해가는 당당하고 매혹적인 모습이 주로 TV 화면을 채웠다. 지난 4월 오피니언 리서치사가 조사한 여론조사에서 역대 최고의 엄마로 선정된 ‘코스비 쇼’의 엄마 클레어 헉스터블이 50년대의 주부상을 재등장시키기도 했으나 현실감 있는 주부는 아니었다. 능력 있는 변호사라지만 일하는 모습이 보여진 적은 거의 없고 가끔 말썽을 피우는 다섯 아이들 때문에 곤란을 겪기도 하지만 아이들을 돌보는 그의 노력이 TV 화면에 드러난 적은 별로 없었다.
주방 일을 하고 있는 80년대 주부의 모습.
7월11일 ABC TV에서 방영된 ‘살림살이 대격돌(The Great Domestic Showdown)’에선 여성들뿐 아니라 남성, 동성애 남성도 출연해 최고의 주부 자리를 놓고 겨뤘는데, 브루클린 출신의 젊은 게이 남성은 “나는 주부다. 몸은 26살 청년이지만 주부 경력은 50살 못지않다”며 실력을 뽐내 미국을 강타하고 있는 살림예술의 열풍을 실감케 했다. 몇 년 전인가, 한 국내 언론사에서 다뤘던 기획기사가 생각난다. 아이들 공부도 더 잘 시키고 남편 출세 내조도 더 잘하고 각종 투자로 재산도 많이 불린 당당한 전업주부들의 얘기였다. 살림에 관한 한 일급 선수임을 자부하면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는데, 왜 굳이 직장에 들어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겠냐고 했던 한 주부의 얘기가 떠오른다. 2004년 지금 한국 TV에 그려진 주부상은 이 시대 주부들의 모습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