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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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을 의심하라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4-07-22 19: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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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사실을 의심하라
    우리 일상을 차분히 돌아보면 오래된 것으로 인식해온 ‘전통’이 실은 생각보다 시·공간적으로 가까운 데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랄지도 모른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과 동료 교수들은 역작 ‘만들어진 전통’에서 수많은 전통이 근대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새로운 국경일, 의례, 영웅이나 상징물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문제는 그런 ‘창조된’ 전통들이 역사와 동떨어져 있으며, 정치적 의도에 의해 조작되고 통제된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왕실 의례가 대표적이다. 엘리자베스 2세가 고색창연한 마차를 타고 개원을 위해 웨스트민스터의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는 모습을 중계하는 TV 방송들은 한결같이 ‘천 년의 전통’을 되뇌지만 사실은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행사라고 한다.

    스코틀랜드의 경우 국가의 상징물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다양한 색깔의 격자무늬 천으로 만든 짧은 치마(kilt)인데, 실은 이것이 18~19세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영국 학교의 넥타이 장식,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5주년 기념행사, 프랑스 삼색기와 바스티유 감옥 함락 기념제, 유럽 전역에 널리 세워진 각종 동상과 기념물들이 ‘창조된 전통’의 대표적 산물들이다.



    왜 이 시기에 이런 전통들이 만들어졌을까. 홉스봄은 이 시기가 유럽에 산업경제가 도래하고 도시화가 전개된 것과 관련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기차와 통신으로 상징되는 산업경제의 발전은 다양한 계층과 집단을 통합할 수 있는 기초가 됐다. 예컨대 기념품이나 그림엽서 등이 만들어지면 즉시 전국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망이 생겼던 것이다.

    특히 이 시기는 국민국가가 대두하던 때였다. 이탈리아(1860년) 독일제국(1871년)이 차례로 통일되면서 유럽의 제국은 국민국가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더욱이 당시는 선거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대중정치가 출현한 시기였다. 국가는 신민들이나 구성원들의 복종과 충성을 확보할 수단이 필요했고, 엘리트는 대중과 연결해줄 수 있는 의례나 상징물들이 필요했다. 그것이 전통의 창조로 연결됐다는 것이다.

    이 책의 번역자인 서울대 박지향 교수(서양사학과)는 “전통의 창조가 특히 국민국가 형성기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것과 국가 및 민족을 둘러싼 거대 담론의 관계를 잘 드러내준다. 전통의 창조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차이점들을 극복하고 ‘상상된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공통분모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분석한다.

    전통의 창조는 외형뿐 아니라 내면에까지 가능했다. 대표적인 예가 웨일스다. 웨일스 민족의 생명력 자체가 소진돼가던 19세기 이곳에선 문화 부활 및 신화 만들기 운동이 펼쳐졌다. ‘웨일스다움’을 창조하는 것, 그러기 위해 과거를 파헤치고 그것을 상상력으로 가공하는 일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꼈다. 19세기 중반 만들어진 웨일스 국가(國歌)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역사적 사실을 의심하라
    ‘태고의 험준한 웨일스여, 음유시인들의 낙원이로다/ 내 눈에 들어오는 절벽과 계곡마다 아름답고/ 애국심으로 넘치며 소리마다 마법과 같도다/ 내 귀에 들리는 강물과 시냇물의 저 소리마다.’

    그러나 이런 환상 심어주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애국자들은 웨일스의 산들이 무섭고 황량하며 적대적이라고 생각했고, 이것은 무엇보다 웨일스인들이 과거에 저지른 죄악에 대해 하나님이 내린 형벌이라고 여겼다.

    아프리카에는 식민시대에 유럽의 ‘만들어진 전통’이 이식됐다. 소설가 은구기 와 티옹고(Ngugi wa Thiongo)는 ‘옥중일기’에서 “식민지의 수많은 매판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지방 유럽인들의 신사다운 세련됨과 숙녀다운 우아함의 알파와 오메가를 배웠기 때문”이라고 당대 케냐 엘리트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은구기처럼 부르주아 엘리트 문화를 공박하는 사람들은 대신 다른 종류의 식민시대 발명품들을 껴안아야 하는 역설에 처했다. 은구기는 식민주의에 대한 케냐의 대중 저항을 전통으로 껴안음으로써 그런 곤란을 해결하고 있지만.

    이 책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으로 역사적 실증주의가 의심받고 역사의 사실(fact)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과거를 기억하는 것과 과거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우리가 진리라고 여겼던 것에 대한 의심은 곧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박지향·장문석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592쪽/ 2만5000원

    Tips | 에릭 홉스봄과 동료들

    에릭 홉스봄 - 런던대학 버벡칼리시 경제사회학과 명예교수. 학술지 ‘과거와 현재’의 창립회원. 저서로 역사에 관한 3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와 ‘노동하는 인간’ ‘극단의 시대’ 등이 있다.

    데이비드 캐너다인 - 컬럼비아대학 사학과 교수. 저서로 ‘귀족과 지주’ ‘귀족제와 도시들’ ‘영국 귀족사회의 쇠퇴와 몰락’ 등이 있다.

    버나드 콘 - 시카고대학 인류학과 교수. 역사와 인류학의 상호작용, 인도사회 연구에 관한 여러 논문이 있다.

    프리스 모건 - 스완시에 있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사학과 교수. 웨일스어로 웨일스 역사책을 많이 썼다.

    테렌스 레인저 - 옥스퍼드대학 인종관계학 석좌교수. 성안토니대 펠로다. 저서로 ‘아프리카 종교의 역사적 연구’ ‘동부 아프리카의 춤과 사회’가 있다.

    휴 트레버 로퍼 - 1957년부터 옥스퍼드대학 역사학과 계관교수를 지냈고, 1980년대엔 케임브리지 피터하우스 칼리지 학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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