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4년 9월 흑해함대를 사열하고 있다. [크렘린궁 제공, 구글 제공]
비장의 카드 꺼낸 푸틴
푸틴 대통령이 2014년 무력을 동원해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한 것도 표트르 대제처럼 흑해 제해권을 확보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자국 땅으로 만들려 했지만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저항으로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게다가 군사 중립국이던 스웨덴과 핀란드가 안보를 위해 중립국 지위를 버리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사실상 가입하거나 가입을 완료해 러시아는 오히려 역풍을 맞았다. 스웨덴이 나토에 합류하면 발트해는 ‘나토의 연못’이 된다. 발트해 인접 국가 모두가 나토 회원국이 되기 때문이다. 표트르 대제의 업적마저 잃게 된 푸틴 대통령은 흑해를 자국 영향력에 두기 위해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그 카드는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로 우크라이나와 체결한 흑해곡물협정의 파기다. 러시아는 7월 18일을 기해 흑해곡물협정을 종료한다고 전격 선언했다. 지난해 7월 22일 발효된 이 협정의 내용은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보장하는 대신 러시아도 곡물과 비료 등을 수출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었다. 또한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공동조정센터(JCC)를 두고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선이 무기 운송처럼 다른 용도로 쓰이지 않는지 검사하는 등 수출입 절차 전반을 관리하도록 했다. 우크라이나는 흑해에서 오데사와 초르노모르스크, 피브데니 등 3개 항구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이 협정이 중요한 이유는 저개발국의 식량난 해소에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소말리아, 예멘,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을 겪는 나라로 보내는 곡물을 우크라이나로부터 구매해왔다. 실제로 이 협정이 발효된 후 밀과 옥수수 수출이 비교적 원활하게 이뤄져 중동과 아프리카 등에 대한 곡물 수출량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는 협정 체결 이후 옥수수 1690만t과 밀 890만t을 포함한 3290만t의 농산물을 수출했다. 전쟁 전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량은 연간 옥수수 2500만~3000만t과 밀 1600만~2100만t 등이었다.
구호단체 국제구조위원회(IRC)는 “흑해곡물협정은 가장 심각한 식량 불안 상태에 놓인 79개국 3억4900만 명에게 생명줄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아리프 후세인 유엔세계식량계획(WFP)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흑해곡물협정이 재개되지 않으면 저소득 국가와 국민이 치솟는 식량 가격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흑해,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통로
국제사회 비판이 고조되자 러시아는 흑해곡물협정을 파기한 것은 자국 농산물과 비료의 수출을 보장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푸틴 대통령은 서방이 5가지 핵심 요구 사항을 이행한다면 즉시 협정에 복귀하겠다고 밝혔다. 5대 요구 사항은 △러시아 농업은행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 재가입 △농기계 및 예비부품의 대러 수출 재개 △러시아 선박·화물의 보험 가입 및 항만 접안 제한 조치 해제 △비료 수출용 암모니아 수송관의 우크라이나 구간 복원 △러시아 비료회사 계좌 동결 철회 등이다.푸틴 대통령의 노림수는 세계적인 식량 가격 폭등을 지렛대 삼아 서방 제재를 해제 또는 완화하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식량 무기화’ 전략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 제재로 SWIFT 결제망에서 퇴출당해 각국과 금융 결제에서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는 또한 우크라이나의 경제적 타격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다. 농업은 우크라이나의 최대 산업이다. 농산물 수출 세계 4위인 우크라이나는 전쟁 전까지 곡물의 75%를 흑해를 통해 수출해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군의 크림대교 공격을 빌미로 흑해의 최대 곡물 수출항인 오데사를 집중적으로 보복 공습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특수부대는 7월 17일 수중 드론으로 크림대교 일부를 파손했다.
푸틴의 자랑 크림대교
러시아와 크림반도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크림대교. [위키피디아]
러시아는 그동안 크림대교를 통해 크림반도의 흑해함대를 비롯해 돈바스 등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들에 각종 무기와 장비를 보내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크림대교는 합법적인 군사 목표물이며 무력화돼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러시아군이 크림대교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공격에 보복을 가하는 것은 이곳이 전략적·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의 조지 바로스 연구원은 “크림대교가 파괴되면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방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가장 큰 문제는 흑해함대가 흑해를 장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흑해함대는 제정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 재위 때인 1783년 5월 창설됐다. 흑해함대는 부동항인 크림반도 세바스토폴이 모항이며 흑해, 아조프해, 지중해가 주요 작전 구역이다. 흑해함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주적이던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해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해군과 우크라이나 해군이 분할됐지만 흑해함대 전력은 대부분 러시아가 차지했다. 흑해함대는 미사일 순양함과 구축함 각 1척, 프리깃함 2척, 호위함 10척, 소해정 9척, 상륙함 9척, 잠수함 1척 등 30여 척을 보유하고 있다.
흑해함대는 기함인 미사일 순양함 모스크바호가 지난해 4월 16일 우크라이나군이 발사한 미사일에 격침되는 바람에 상당한 수모를 겪기도 했다. 당시 우크라이나군은 소련의 KH-35 순항미사일을 개량해 제작한 넵튠 지대함미사일 2발을 모스크바호에 명중시켰다. 모스크바호는 소련 시절 건조된 슬라브급 미사일 순양함의 1번 함으로 배수량 1만1500t, 길이 187m, 폭 21m에 승무원 500여 명이 탑승할 수 있는 대형 함정이었다. 모스크바호 침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 해군이 입은 최대 손실로 평가된다. 이후 러시아는 흑해함대 전력을 강화하는 등 흑해 제해권을 차지하기 위해 절치부심해왔다.
“나토 군함, 흑해함대와 맞설 수도”
러시아 흑해함대 함정이 7월 21일 순항미사일 발사 훈련을 하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 제공]
러시아의 의도는 흑해함대를 동원해 흑해를 완전히 장악하는 동시에 독자적인 곡물 운송 루트를 구축하려는 것이다. 자국산 곡물 수송 루트를 확보해 아프리카 등 저개발 국가의 식량 위기 우려에 대처하고,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출을 방해해 세계 시장에서 퇴출하려는 의도다. 러시아의 흑해 장악은 식량 무기화 전략에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나토 회원국 함정들로 호위 선단을 만들어 자국 곡물 수송선을 통해 곡물을 수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제임스 스타브리디스 전 나토 총사령관은 “최악의 경우 나토 군함과 러시아 흑해함대가 직접 맞서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부동항이 있는 발트해의 제해권을 나토에 빼앗긴 만큼 흑해는 절대 내줄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푸틴 대통령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성공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