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이 불량하다.”
지난해 한 기업의 채용 면접장에서 유모(27) 씨가 면접관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판매직에 지원한 그에게 면접관은 “게슴츠레한 눈빛 때문에 태도가 불량해 보인다. 그러니 고객이 당신을 믿을 수 있겠나. 정말 본인의 외모가 판매·영업직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나”라며 면박을 줬다. 유씨는 “못생겼다는 얘기를 다양한 표현으로 한참 듣다 보니 ‘이런 취급을 받아가면서까지 면접을 봐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면접장을 박차고 나가면 혹시 업계에 소문이 돌아 취업에 불이익이 생길까 싶어 꾹 참고 면접을 마쳤다”고 말했다.
유씨 같은 사례 외에도 입사 면접 자리에서 면접관들이 ‘갑질’을 넘어 인격모독성 발언을 쏟아내는 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매년 면접관들의 도 넘은 발언이 항간에 오르내리지만 그들의 갑질은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극심한 취업난 탓에 일자리가 절실한 취업준비생이 면접관에게 불만을 제기하기는 어렵기 때문. 일각에서는 면접관의 폭언이나 인격모독 등에 대한 처벌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웃겨보라” “몸매가 좋다”
지난해 하반기 공채 금융권 영업직에 지원한 박모(26) 씨는 면접관으로부터 “웃겨보라”는 주문을 받았다. 박씨는 “취업한 선배들이 면접장에서 ‘웃겨보라’는 주문을 받아봤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지만 막상 겪어보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급한 대로 당시 인터넷에서 회자되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면접관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한 면접관은 ‘그렇게 순발력이 없는데 어떻게 영업을 하려 하느냐’며 도리어 핀잔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면접관의 갑질은 취업준비생이라면 한 번쯤 겪는 통과의례가 됐다. 온라인 취업 사이트 인크루트가 지난해 11월 22일 2016년 하반기 채용 면접 경험이 있는 회원 56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4.1%가 ‘면접관의 갑질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는 지난해 상반기 조사 결과(63.6%)에 비해 10%가량 높아진 수치다. 채용 시즌마다 면접관의 무분별한 언행에 많은 취업준비생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지만 채용 면접 갑질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것.
대다수 면접 응시자는 채용전형에서 탈락할까 두려워 면접관이 무례한 질문을 해도 감내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같은 조사에 따르면 갑질 면접을 경험했다는 응답자 중 9%만이 적극적으로 불쾌감을 표했다. 면접관에게 질문의 의도를 물어 우회적으로 불쾌감을 표현한 응답자도 8.6%에 불과했다.
이처럼 면접 응시자가 취업에 절실하다는 점을 악용해 면접관이 성희롱을 일삼거나 인격모독성 발언을 쏟아낸 사례는 허다하다. 지난해 하반기 소규모 마케팅 대행업체에 지원했던 오모(26) 씨는 “면접장에서 중년의 인사담당자가 여자친구가 있느냐고 물었다. 별생각 없이 있다고 대답했더니 ‘여자친구와 성관계는 하고 있느냐’고 다시 질문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대답을 흐리자 면접관은 재차 답변을 요구했다. ‘이렇게 무례한 질문에도 대답해야 하나’ 싶었지만 당장 일자리가 급해 ‘하고 있다’고 답했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의 이모(28·여) 씨는 지난가을 한 콘텐츠개발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회사 인사담당자는 “취업 사이트에 올려놓은 이력서를 보고 연락했다. 일주일간 회사에서 일해보고 간단한 면접을 통과하면 정규직으로 채용할 생각”이라며 “관심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원하던 직무에서 일할 기회라고 생각해 흔쾌히 제안에 응했다. 무급으로 일주일 정도 일한 마지막 날 담당자는 이씨에게 수시 면접이 있다며 술자리로 불렀다. 이씨는 “면접이라던 술자리에 가보니 아무도 없고 담당자와 나만 있었다. 이상하다 싶었지만 면접이라니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담당자가 처음에는 일 관련 얘기를 하는가 싶더니, 시간이 좀 지나자 ‘몸매가 좋아 남자들이 좋아하겠다’며 성희롱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면접이라던 술자리 내내 본인 주변 사람들의 성생활을 소재로 음담패설만 쏟아냈다”고 말했다.
“학벌이 왜 그래?” “부모님 수입은?”
실제로 구직자 절반 이상이 면접장에서 갑질을 넘어선 인권침해를 어쩔 수 없이 견디고 있다.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와 청년희망재단이 구직 활동을 하는 만 19~29세 청년 108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64.8%가 면접 과정에서 모욕적 언사나 성차별·성희롱 등 면접관으로부터 인권침해를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지난해 하반기 한 디자인업체 채용전형에 응시한 정모(25·여) 씨는 최종 면접 현장에서 면접관의 폭언에 시달렸다. 한 면접관이 정씨에게 “고향이 전남 광주인데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다.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 경기 광명시에 자취방을 구해 살고 있다고 대답하자 면접관은 대뜸 “이력서에 부모님이 자영업을 한다고 쓰여 있던데, 외동딸에게 집도 마련해주지 못하는 것을 보면 벌이가 시원치 않은가 보다”고 말했다. 정씨는 “면접장에서는 머쓱하게 웃어 넘겼지만 집에 돌아와 곱씹어보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면접관이 부모님 흉을 봐도 취업해보겠다며 면접장에서 웃고 있었던 나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압박 면접이라며 이유 없이 지원자를 꾸짖는 악습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지방 사립대 출신인 민모(27) 씨는 지난해 하반기 대기업 계열 보험사에 지원했다. 면접장에서 민씨의 입사지원서를 본 한 면접관은 그에게 “지원자 대부분이 토익점수가 900점이 넘는데 당신만 800점대다. 학벌도 좋지 않은데 (우리 회사처럼) 좋은 직장에 취업하려면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나. 도대체 학교 다닐 때 뭘 했냐”며 핀잔을 줬다. 민씨는 “면접장에서 ‘어학점수는 낮지만 각종 공모전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고 학과성적도 좋았다’며 해명 아닌 해명을 했다. 하지만 학벌 얘기를 꺼낸 면접관은 ‘지방 사립대에서 학점이 좋은 것은 자랑이 아니다’라며 다시 한 번 자존심을 짓밟았다”고 말했다.
성별이나 정치적 성향 등으로 지원자에게 차별적 발언을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서울 종로구의 윤모(24·여) 씨는 “대기업 영업직 면접 현장에서 한 인사 담당자로부터 ‘영업직은 접대 등 원하지 않는 술자리도 많은 직군이라 여성은 적합하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다. 직군에 적합하지 않아 여성을 뽑지 않을 거라면 왜 굳이 최종면접까지 보게 해 서로 시간낭비를 하는지 의아했다”고 말했다.
일부 취업준비생은 면접장에서 일어난 부당행위를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호소하기도 한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제44조에 따르면 인권위는 인권침해나 차별 행위가 밝혀지면 해당 기관에 시정을 권고할 수 있다. 동법 제45조에는 진정 내용이 범죄에 해당하면 인권위가 검찰에 고발해 처벌이 가능하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권위에 접수된 면접장에서의 인권침해 사례는 총 2건. 이 중 검찰 고발까지 이어진 사례는 없다.
지난해 7월 경기도평생교육진흥원 연구기획 분야 정규직 채용 면접을 본 김모(26) 씨는 면접관으로부터 “정치 성향이 진보인지, 보수인지 답변해달라”는 질문을 받았다. 김씨가 “진보라고 생각한다”고 답하자 면접관은 다시 “왜 진보라 생각하는지 답변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채용에서 탈락한 김씨는 ‘면접관에게 업무수행 능력과 무관한 질문을 받았다’며 8월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약 5개월간 조사 끝에 올해 1월 31일 김씨의 진정을 받아들였다. 인권위 차별시정위원회는 결정문을 통해 “면접과정에서 차별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질문은 의도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금지될 필요가 있다”며 경기도평생교육진흥원장에게 재발 방지 대책 수립을 권고했다.
인격모독 500만 원 과태료 법 개정안 발의
고용정책 기본법 제7조에 따르면 고용주는 성별, 사회적 신분, 신앙, 출신 지역, 학력 등으로 구직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 면접장에서 자행되는 차별적 발언은 대부분 이 조항을 위반하는 셈이다. 그러나 차별을 금지한다는 규정만 있을 뿐 관련 처벌 규정은 없다. 면접장에서 자행되는 성희롱도 형법상 처벌이 어렵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2조와 양성평등기본법 제3조에 성희롱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지만 성희롱에 대한 형법상 처벌 규정은 없기 때문이다.
면접관의 인격모독성 발언은 형법상 처벌이 가능하다. 형법 제307조와 제311조에 따르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모욕을 가할 경우 최대 2년 이하 징역, 5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문정구 법무법인 한길 변호사는 “명예훼손이나 모욕죄가 성립하려면 관련 내용이 타인에게 전파될 수 있다는 공연성이 입증돼야 한다. 면접은 보통 다수의 면접관과 다수의 지원자가 만나는 형태로 이뤄진다. 따라서 면접관이 지원자에게 명예훼손이나 모욕적 발언을 했을 경우 공연성이 인정돼 형사 고소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용 시장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우려해 면접관을 고소하는 지원자가 없어 실제 처벌까지 이어진 판례는 아직 없다”고 말했다. 면접관의 폭언에 대해 민사소송이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한범수 법무법인 신효 변호사는 “단순 폭언으로는 손해배상 액수가 크지 않아 취업이 급한 청년이 소송을 내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현행법으로는 면접장에서 인권침해를 막을 방법이 없다 보니 국회가 법 개정에 나섰다.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 소속 국민의당 김삼화 의원은 지난해 10월 26일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에는 면접관이 면접 응시자를 인격적으로 모독할 경우 500만 원 이하 과태료에 처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해당 법안은 현재 환노위에 계류 중이다. 김 의원실 관계자는 “채용 과정에서 인권침해 사례 조사는 인권위의 소관업무라며 정부 측에서 반대해 이 조항이 통과되지 못했다. 따라서 올 하반기 환노위에서 이 법안을 다시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