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의 확산에 따른 달걀 가격 폭등 문제를 해결하고자 정부가 추진한 신선란 수입정책이 국내 달걀 가격 안정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한 채 정작 중·대형마트에게만 ‘반짝’ 이익을 안겨준 것으로 드러났다.
항공운송료 등 엄청난 운임이 드는 수입산 달걀은 한번에 많은 양을 들여와야 국내산 달걀과의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영세소매점은 목돈 마련이 어려워 외국산 달걀의 대량수입은 엄두도 못 내는 실정이다.
더욱이 1월 중순 1만 원까지 올랐던 국내산 달걀 한 판(이하 30개 기준)의 가격이 2월 들어 7000원대 후반까지 떨어짐에 따라 수입 원가가 8000원가량인 외국산 달걀의 가격경쟁력은 거의 사라진 상태다. 농림축산식품부(농림부)는 달걀 가격 하락의 이유를 신선란 수입에서 찾고 있지만, 양계업계는 AI 방역으로 묶여 있던 국내산 달걀이 조금씩 시중에 풀리기 시작한 것을 그 원인으로 보고 있다.
달걀 직수입, 누구 배 불렸나
당초 정부는 수입 신선란에 대한 관세 면제 대책을 발표하면서 “수입 달걀은 가공용으로 판매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23일 농림부는 신선란 수입을 주요 내용으로 한 ‘달걀 수급안정화 방안’을 발표했는데, 이날 이천일 농림부 축산정책국장은 기자브리핑을 통해 “신선란을 취급하는 민간업체를 대상으로 수요 조사를 한 결과 수입산 달걀 가공제품(난황액 등) 수요가 많았고, 수입 신선란 수요도 분명히 있다. 다만 수입 신선란은 시중에 유통하기보다 제빵용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다.하지만 농림부 발표에도 1월 중·후반부터 수입 신선란은 중·대형마트를 중심으로 판매됐다. 1월 21일 서울 구로구 고척동 드림홈마트가 미국산 신선란을 한 판에 8950원에 판매한 것을 시작으로 23일부터는 롯데마트가 전국 114개 매장에서 8490원에 팔았다. 23일 하루 롯데마트에서 팔린 미국산 신선란만 1만3000판(39만 개)으로, 이는 AI 사태 이전인 11월 하루 국내산 달걀의 판매량(1만~1만8000판)과 비슷한 수준이다. 수입 신선란에 대한 소비자의 거부감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던 셈.
소비자들이 수입 신선란을 구매한 이유는 국내산 달걀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달걀 가격 공시에 따르면 달걀 한 판의 평균 가격은 9285(1월 21일)~9180원(23일) 선이었다. 같은 기간 수입 달걀의 한 판 가격은 국내산 달걀에 비해 200~500원 저렴했다. 이 때문에 일부 중·대형마트는 가격경쟁력이 있는 수입 달걀로 반짝 이익을 볼 수 있었다.
수입산 달걀이 높은 운송료에도 국내산보다 저렴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지원 때문이다. 농림부는 1월부터 2월 말까지 수입 달걀의 관세를 전면 면제하고 달걀 운송료의 50%를 지원하기로 했다. 대한양계협회에 따르면 수입 달걀을 들여오는 원가는 판당 7000~7500원. 여기에 국내 유통비(판당 500~1000원)를 추가하면 달걀 한 판의 판매 원가는 8000원 선이다. 이와 관련해 롯데마트 관계자는 “1월 말 판매한 수입 달걀에는 마진을 붙이지 않았다. 지난번 수입 달걀 판매는 가격 폭등으로 고통받는 소비자들을 위해 사회공헌 차원에서 한 일종의 이벤트였다”고 밝혔다.
롯데마트의 해명이 사실이라면 판매 인건비 등을 포함하면 수입 달걀 한 판의 최종 판매 원가는 8490원이라고 할 수 있다. 수입 달걀 한 판을 8950원에 판매한 중·대형마트는 판당 460원 이익을 본 셈. 1월 21일부터 2월 1일까지 국내에 수입, 판매된 달걀은 약 20만 판이다.
문제는 수입 달걀 판매가 가능한 곳이 중·대형마트뿐이라는 사실이다. 설 연휴 직전인 1월 24일 서울 관악구에서 만난 영세마트 운영자 유모(48) 씨는 “달걀은 신선도와 재고 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보통 이삼일 내 판매할 수 있는 양만 유통업자로부터 구매한다. 하루에 500판 이상 판매가 가능한 중·대형마트라면 공동구매라도 불사해 수입산 달걀을 들여왔겠지만, 지금 우리 같은 규모에서는 수입 달걀을 들여놓는 것 자체가 무리수”라고 말했다.
설 연휴가 지나자 달걀 가격은 소폭 하락했다. 평균 9000원대 초반이던 달걀 한 판 가격이 8000원 선까지 떨어졌다. 정부는 달걀 가격의 하락 폭을 보면 신선란 수입이 효과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농림부 축산과 관계자는 “신선란을 수입한 이후 실제로 달걀 가격이 소폭 떨어졌다. 그러자 일부 유통업자가 가격 상승을 노리고 모아놓았던 달걀을 시중에 내놓으면서 국내산 달걀의 시장 공급량도 소폭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달걀 수입, 가격 하락 효과는 극히 미미
그러나 예년과 비교해보면 달걀 한 판 가격은 여전히 비싸다. aT 공시에 따르면 2월 7일 달걀 한 판의 평균 가격은 8400원으로 수입 달걀을 들여오기 전에 비해서는 소폭 낮아졌다. 하지만 지난해 2월 달걀 한 판의 평균 가격은 5498원, 평년 가격은 5616원으로 현재에 비해 30%가량 저렴했다.
양계업계는 수입으로 가격 폭등 문제를 해결하려는 발상 자체가 패착이라고 주장한다. 대한양계협회 관계자는 “정부의 달걀 수입책이 가격을 조금 떨어뜨릴 수는 있다. 하지만 수입만으로 국내산 달걀 가격이 수입산보다 낮아지기는 어렵다. 가격 하락의 더 큰 이유는 국내산 달걀의 시장 공급량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21일 농림부는 AI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AI 방역 매뉴얼’을 강화했다. 당초 달걀 반출제한(방역 확대 조치) 대상 범위를 AI 발생지 반경 500m에서 3km 내로 넓힌 것이다. 농림부의 방역 확대 조치로 닭 약 1440만 마리가 낳은 달걀이 산지에 묶여 있었다(대한양계협회 조사 결과). 그러나 12월 28일 달걀 수급량 부족으로 달걀 가격이 판당 1만 원을 호가하자 정부는 AI 방역 매뉴얼을 완화해 AI 발생지 반경 500m 초과 3km 이하인 농가에서 생산되는 달걀을 매주 수요일 시중에 반출하도록 했다. 그 결과 반출 첫날인 28일 하루 총 580만 개 달걀이 반출제한 지역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AI 발생지 반경 10km 내 양계농가를 대상으로 한 매주 1회 달걀 반출제한 조치로 달걀 공급 차질은 여전한 상황이다.
대한양계협회 관계자는 “정부당국이 국내산 달걀의 반출제한 조치 완화를 조금만 서둘렀어도 달걀 가격은 더 빠르게 떨어졌을 것이다. 현재 AI 발생지 반경 10km 내 양계농가는 일주일에 한 번, 3km 내 농가는 매주 수요일에만 달걀 반출이 가능하다. 이 조치만 풀린다면 달걀 가격은 2월 안에 예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농림부는 달걀 반출제한 조치를 완화할 생각이 없다. 농림부 방역관리과 관계자는 “달걀 반출제한 조치로 묶여 있는 물량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안다. 게다가 2월 6일 산란계 농가에서 AI 의심신고가 접수된 만큼 아직은 달걀 수급 문제보다 방역에 더 집중할 때”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