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없다.”
지난해 12월 20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자신의 대통령선거(대선) 출마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이렇게 잘라 말했다. 하지만 두 달도 지나지 않은 요즘, 그의 어법은 확연히 달라졌다. “문 조심하세요”(2월 2일), “지금 길이 막혀 있어요”(2월 6일), “(대선 관련 입장을 밝힐) 적당한 때가 있을 겁니다”(2월 7일). 대선 출마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황 대행은 언제부터인가 다의적인 어법으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을 추구하는 모습이다. 지난해 국회 답변을 끝으로, 그는 수많은 질문을 받았음에도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결국 상황을 더 지켜보다 대선에 뛰어들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해석으로 연결된다.
대선 출마 얘기에 선을 긋던 황 대행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불출마 선언 이후부터다. 가장 유력하던 보수진영 후보가 사라진 상황에서 여론조사 전문기관들은 ‘황교안’이라는 이름을 넣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갈 곳을 잃은 보수층은 그의 지지율을 올려줬다. 여론조사와 언론보도가 쌍끌이를 해주는 가운데 황 대행은 유승민, 남경필 등 기존 주자들을 제치고 보수진영 선두주자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출마 여부는 대선구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변수로 부상했다.
대선 출마설 즐기는 황 대행
대통령직을 대행하는 사람이 계속 대선 출마설의 한복판에 서 있으면 여러 가지로 국정운영에 혼선이 생길 수 있다. 중립적 위치에 있어야 할 대통령 권한대행이 특정 정당 편을 드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거나, 최근 그의 행보가 대선 출마용이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일 수 있다. 만약 황 대행이 출마하면 ‘권한대행의 대행’이 나라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된다는 불안도 생길 수 있다. 그만큼 황 대행 자신이 정치적 시비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국정에 전념해야 해 대선 출마 생각이 없다면 당연히 자신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들을 종식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황 대행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듯하다. 오히려 작금의 상황을 즐기는 듯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단지 권한대행으로서 영향력을 높이려는 전략적 태도일까, 아니면 실제로 대선 출마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대선 출마와 관련해선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많이 나온다. 그는 박근혜 정부의 2인자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상황의 공동책임자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런 황 대행에게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심판으로 치르게 될 조기 대선에 출마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헌법 제86조 2항은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황 대행은 국무총리로서 박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고, 최순실이 농단한 행정 각부를 제대로 통할하지도 못한 데 대한 일차적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청와대와 함께 블랙리스트를 만들거나 보건복지부가 삼성의 경영권 승계를 지원하고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성사시켰다는 의혹이 커질 동안 황 대행의 역할은 부재했다. 다만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 상태에서 국정 혼란을 걱정하는 국민 정서 때문에 지금 자리를 인정받으며 여론조사 지지율도 10% 이상 나오고 있다. 이것을 자신의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의 지지라고 해석하는 건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그에게 부여된 책임 가운데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인용 결정이 났을 때 치르게 될 조기 대선을 공정하게 관리하는 임무도 있다. 그가 출마하면 심판이 직접 선수로 변신하는 희극적인 상황이 빚어지는 것이다.
황 대행이 대선 출마에 관심을 갖는 데는 절박해진 보수진영의 강력한 기대가 작용하고 있다. 보수세력은 반 전 총장의 대선 불출마 선언 이후 야당 후보들과 겨룰 만한 후보 자체가 없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과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있지만 지지율이 저조해 야당 후보들의 대항마가 되기 어려운 실정이다. 새누리당이 이름을 바꾼 자유한국당에서도 원유철, 안상수 의원, 이인제 전 의원이 출사표를 던졌지만 여론조사 대상에도 들지 못하고 있다. 특히 자유한국당은 의미 있는 후보를 내지 못할 경우 대선정국에서 아예 실종될 위기에 처했다. 자유한국당 처지에선 황 대행의 출마가 당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자유한국당은 이번 대선에서 재집권까지 기대하기는 어렵다 해도 황 대행 같은 후보를 배출해 일정한 지지를 받으면 정치적으로 생존은 가능하다. 또 바른정당과 경쟁에서도 우위를 차지해 보수세력의 구심이 될 수 있다.
보수의 기대를 한 몸에
황 대행이 대선주자로 나서면 검증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과거 법무부 장관과 국무총리 인사청문회 때 불거졌던 병역 면제 논란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선주자로선 큰 부담이다. 청문회에서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던 전관예우도 약점이다. 특히 법무부 장관 재직 당시 국가정보원 댓글수사팀에 좌천성 인사 조치를 하고 기소 과정에도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논란이 다시 불거질 것이다. 지금은 사실상 무풍지대에 있는 황 대행이지만, 일단 대선 한복판에 들어서면 큰 ‘데미지’를 안길 수 있는 사안들이다.
반 전 총장의 경우에서 봤듯이 그도 임명직공무원으로서 평생을 보냈고 정치 경험이 전무하다. 야당이 벼르고 달려드는 가혹한 검증 공세를 참고 버텨낼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반응이 많다. 그런 점에서 황 대행은 출마를 강행할 경우 ‘제2의 반기문’이 될 공산이 크다.
설령 황 대행이 출마한다 해도 지금 상황에선 당선 확률이 낮아 보인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인용하면 이번 대선은 탄핵이라는 역사적 사건 위에서 치르는 선거가 된다. 따라서 ‘박근혜 아바타’ 소리를 들었던 황 대행의 지지 기반은 그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다. 보수층의 지지는 받을 수 있겠지만, 지지세력을 넓히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다.
더욱이 당을 선택한다면 자유한국당 외에는 생각하기 어렵다. 바른정당과 통합이나 단일화가 쉽지 않다고 볼 때 원내 제2당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보수정당의 후보가 됐다는 것 이상의 효과를 내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결국 황 대행은 대선 출마 이후에도 계속 정치를 하면서 보수정당 세력의 리더가 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선을 기대하기 어려운 선거에 뛰어들어 검증에 시달려야 하고 차기 정부 아래에서 야당 정치인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큰 앞날을 감안할 때 과연 그가 출마 결심을 할지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