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며 고대역폭메모리(HBM) 설계 업무를 맡았던 전직 연구원 A 씨가 2023년 마이크론 본사에 임원으로 입사했다. [GettyImages]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이 3월 13일 전화 통화에서 국내 반도체 기업의 인력 및 기술 유출 문제에 관해 한 말이다. 최근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선 주요 직책을 맡았던 임직원이 해외 기업으로 자리를 옮기는 사례가 늘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AI) 열풍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위한 열띤 경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국내 기업이 경쟁사의 인력 빼가기로 선두 자리를 위협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된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미국 마이크론에 직원을 뺏겼다. SK하이닉스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며 HBM 사업 수석, HBM 디자인부서 프로젝트 설계 총괄 등을 지낸 전직 연구원 A 씨가 2022년 퇴직하고 이듬해 마이크론 본사에 임원으로 입사한 것이다. A 씨는 퇴직 시점에 “2년간 경쟁사에 취업하거나 용역·자문·고문 계약을 맺지 않는다”는 내용의 전직금지약정서를 작성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최근 마이크론이 국내 기업보다 먼저 5세대 HBM(HBM3E) 양산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인력 유출의 영향 때문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서 각각 주요 직책을 맡았던 임직원들이 경쟁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반도체 기술 유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법원, 기업 손 들어주며 제동
앞서 삼성전자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여럿 있었다. 20여 년간 D램 설계 업무를 담당한 전직 연구원 B 씨가 2022년 마이크론 일본 지사에 입사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B 씨는 퇴사 직전 삼성전자와 전직금지약정을 체결했으나 이행하지 않고 3개월 만에 마이크론행을 택했다. 전 임원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통째로 복제하려 하기도 했다. 중국에 반도체 제조 기업을 설립한 전직 삼성전자 상무가 삼성전자 현지(중국 시안) 공장 설계 도면을 빼내 인근에 그를 본뜬 공장을 건설하려다 지난해 적발된 것이다.'법원은 이 같은 반도체 인력 유출에 제동을 걸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각각 A 씨, B 씨를 상대로 낸 전직금지 가처분신청에서 모두 기업 손을 들어줬다. “기업 영업비밀 보호를 위해 필요한 조치”라면서 A 씨는 SK하이닉스에 하루당 1000만 원, B 씨는 삼성전자에 하루당 500만 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임직원이 자긍심 느끼는 수밖엔”
하지만 법원 판결만으론 경쟁사의 기술 탈취를 막기에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양팽 전문연구원은 “이 돈을 개인이 낸다고 하면 큰 액수일 수 있지만 마이크론 같은 기업이 대납한다고 하면 결코 크지 않다”며 “이제 시작 단계인 HBM 시장에서 기술을 이전받아 벌어들이게 될 미래 이익을 생각하면 이 정도 처벌 수위로는 경쟁사의 공격적 (인력) 영입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기업이 임직원의 전직금지 위반 사실을 직접 파악해 조치해야 한다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퇴직 임직원의 이직 여부를 일일이 모니터링하기 쉽지 않고, 알아내더라도 법원 판단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소요돼 그동안은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어서다. SK하이닉스가 A 씨를 상대로 낸 전직금지 가처분소신청은 결론이 나기까지 약 7개월이 걸렸다. A 씨의 약정 기간은 올해 7월까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처우 개선을 통해 추가 인력 유출을 방지하겠다는 입장이다. 해외 기업의 높은 연봉 수준과 복리후생제도가 이직의 주된 원인이 되고 있는 만큼 성과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하겠다는 것이다. 정년 없이 기업에서 근무할 수 있고, 격려수당도 주어지는 명장(마스터) 제도가 그중 하나다. 국내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3월 13일 전화 통화에서 “기업은 전직금지약정, 비밀유지서약 등으로 최대한 인력 유출을 방지하고 있다”며 “그 외에는 임직원으로 하여금 국가 핵심 기술 개발 종사자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경쟁사로 떠나지 않게 하는 것밖에 뚜렷한 방법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