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스케일파워가 건설하는 소형 모듈 원자로(SMRR)의 핵심 기기는 두산중공업에서 만든다. [사진 제공·두산중공업]
그런데 올해 영국을 비롯해 북해에 면한 국가들의 풍력발전량이 크게 줄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로 바람 속도가 느려져서다. 문제는 바람 속도에 따라 발전량이 들쭉날쭉한 풍력발전의 비중을 높이다 보니 안정적인 전력 공급에 차질이 빚어진 것이다. 풍력발전량 감소에서 시작된 전력난은 수입에 의존하는 천연가스 부족 사태와 가격 폭등, 전기료 상승으로 이어졌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천연가스 12월 선물 가격은 런던거래소에서 연초 대비 400%나 폭등하면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영국, 풍력발전량 감소로 전력난
영국 정부는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2050년 탄소중립(제로) 목표를 달성하고자 새로운 원전과 소형 모듈 원자로(Small Modular Reactor·SMR) 건설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상업용 원자로를 만든 ‘원전 종주국’이지만 원전의 안전성 논란이 불거진 1990년대 이후 탈원전정책을 추진하면서 새로운 원전을 건설하지 않았다. 문제는 영국에서 원전은 전체 전력의 20%를 차지하는데 기존 원전의 노후화로 이 비중이 2025년 10%가량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올해처럼 풍력발전이 크게 줄어들면 화석연료 비중이 높아져 탄소배출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2050년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해 2035년까지 탄소배출을 78% 감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탄소배출 없이 전력을 공급하는 방안은 원전밖에 없다. 이에 따라 영국 정부는 현재 가동 중인 8개 원전의 가동 기한을 연장하고, 3개 원전을 신설할 계획이다. 특히 영국 정부는 민간기업의 SMR 개발과 건설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SMR는 원자로와 증기 발생기 등을 한 용기에 담은, 발전용량이 300㎿ 이하인 차세대 원전을 말한다. 기존 대형 원전 발전용량의 3분의 1을 생산하는 SMR는 격납고가 필요 없어 건설비용이 적고, 원자로 모듈이 수조(水槽)에 잠겨 외부 충격에도 방사능 누출 위험이 낮다. 이에 SMR는 탄소배출이 거의 없고 뛰어난 안전성과 경제성을 갖춰 미래 에너지의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로 꼽힌다.
영국에서 SMR 사업을 추진하는 민간기업은 항공·에너지 기업 롤스로이스다. 세계 3대 명차 중 하나로 꼽혀온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제작하는 롤스로이스는 세계 3대 항공기 엔진 제작업체로도 유명하다. 롤스로이스는 SMR를 건설하고자 영국 국립원자력연구원, 건설회사 랭오루크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롤스로이스는 11월 9일 영국 정부로부터 2억1000만 파운드(약 3337억 원), 미국 에너지 기업 엑셀론 등으로부터 1억9500만 파운드(약 3098억 원)를 투자받기로 했다고 밝혔다. 롤스로이스는 2030년까지 SMR 16기를 만들 계획이다.
유럽 최대 원전 대국인 프랑스도 그동안 추진해온 탈원전정책을 180도 바꾸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1월 9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에너지 자립을 보장하고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신규 원자로 건설을 재개한다고 밝혔다. 그는 “만약 우리가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합리적 가격으로 에너지 비용을 지불하고 싶다면 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 안정적인 전기 공급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2017년 취임 직후 발표한 에너지 구성에서 원전 비중을 당시 75%에서 2035년 50%로 낮추겠다고 밝힌 바 있다. 마크롱 대통령의 ‘원전 복귀’ 선언은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는 등 에너지 대란이 빚어지면서 원전 감축 기조를 유지하기 어려워진 점이 영향을 미쳤다. 또한 탄소중립 목표 달성이 원전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세계 각국 신규 원전 건설 계획 발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11월 9일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밝히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트위터]
미국 정부도 에너지부의 ‘원자력 전략 비전’에 따라 차세대 원자로 기술과 SMR 개발에 7년간 32억 달러(약 3조7860억 원)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원자력 전략 비전은 △기존 원전의 계속 운전 △차세대 원자로 도입 △차세대 연료 주기 개발 △미국의 원자력 리더십 유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 민간 에너지 기업들도 SMR 및 원전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
미국 뉴스케일파워는 아이다호주 국립연구소에 발전용량 60㎿급 SMR 12기로 이뤄진 총 720㎿ 규모의 소형 원자력 발전단지를 구축할 계획이다. 뉴스케일파워는 11월 1일 루마니아 국영 원자력 에너지 회사 뉴클리어 일렉트리카와 함께 유럽 최초로 루마니아에 기당 77㎿짜리 SMR 12기를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뉴스케일파워는 한국 두산중공업, 삼성물산, GS에너지 등의 투자를 유치했고 미국 에너지부로부터 14억 달러(약 1조6565억 원)를 지원받았다. 두산중공업은 루마니아에 건설되는 SMR 12기에 필요한 핵심 기자재를 공급할 계획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의 테라파워도 10억 달러(약 1조1830억 원)를 들여 미국 와이오밍주의 노후 석탄화력발전소 부지에 차세대 기술인 소듐 냉각 고속로가 적용된 SMR를 건설해 2030년부터 가동할 계획이다.
석탄 부족으로 전력대란을 겪은 중국도 2035년까지 4400억 달러(약 520조5200억 원)를 투입해 최소 150기의 신규 원전을 건설한다는 방침이다. 중국이 건설하려는 원전 150기는 전 세계가 지난 35년간 건설한 원전보다 많다. 미국을 제치고 원전 1위 국가가 되려는 중국은 또 SMR 개발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브라질도 2031년까지 추진하는 ‘국가에너지계획’에 4번째 원전 건설을 포함시켰다. 폴란드는 원전 6기를 건설하는 계획을 담은 ‘2040 에너지 전략’을 2043년까지 추진한다. 체코도 두코바니 원전 5호기를 건설할 계획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미국은 물론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중국 등이 SMR 개발과 건설 부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각국이 현재 개발 중인 SMR는 71기다. 대표적으로 미국과 러시아가 각각 17기, 중국 8기, 일본 7기, 한국과 영국 각각 2기 등이다.
SMR 기술 개발 면에서는 러시아가 가장 빠르다. 러시아는 2019년부터 SMR를 적용한 해상 부유식 원전인 아카데믹 로모소노프를 운영하고 있다. 이 원전은 송전선 설치와 대형 발전소 건설이 어려운 극동지역 추코트카 자치구에서 70㎿ 규모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는데, 3~5년간 연료 재장전 없이 계속 가동해 발전비용도 대폭 절감할 수 있다. 러시아는 2028년까지 동시베리아 야쿠티아 지역에 SMR를 건설해 상용화할 계획이다.
SMR 상용화에 앞선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 정부는 SMR를 2050년 탄소중립을 실현할 핵심 기술로 꼽고 있다. 알레시아 덩컨 미국 에너지부 부차관보는 “SMR를 활용한 미래 원전은 탄소배출 감축과 유연한 전력망 등 다양한 이점을 지닌다”고 밝혔다.
미국 뉴스케일파워가 아이다호주에 건설할 SMR 조감도. [사진 제공 · 두산중공업]
탈원전정책 고수하는 한국
SMR 개발에서 가장 앞서가는 민간기업은 뉴스케일파워다. 뉴스케일파워는 지난해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로부터 SMR에 대한 설계 인증을 최초로 받고 시제품까지 제작했다. 뉴스케일파워의 SMR는 검증된 상용 경수로 기술을 기반으로 안전성과 경제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모델이다. 특히 이 SMR의 핵심 기기를 만드는 제조사는 두산중공업과 미국 BWXT뿐이다.한국은 SMR 개발에 일찍 뛰어들어 세계 최초 SMR인 ‘스마트(SMART)’를 개발했지만 탈원전정책으로 아직까지 상용화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세계 각국이 탄소중립을 위해 SMR에 주목하고 있지만, 문재인 정부는 SMR 상용화 기술이 개발되더라도 수출용으로만 한정하고 국내에는 SMR를 건설하지 않기로 했다. 문재인 정부는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에서 2050년까지 원전 비율을 6~7%로 낮추고, 태양광이나 풍력 등 재생에너지 비율을 70%까지 높이는 방안을 제시했다. 세계 각국이 원전 건설과 SMR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문재인 정부의 시대착오적 탈원전정책으로 한국 원전산업은 ‘우물 안 개구리’ 신세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