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뉴욕타임스’는 올해 가볼 만한 최고의 도시 3위에 서울을 올려놓았다. 반면 지난해 세계적인 한 여행안내 출판사가 ‘세계 최악의 도시’ 중 하나로 서울을 꼽았다. 상반된 평가의 기준과 객관성에 국내 언론과 많은 시민은 의아해하고 있다. 어느 쪽이 맞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두 가지 평가 모두 맞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메가시티 네트워크 : 한국현대건축 서울전’ 특별강연을 위해 1월 내한한 피터 슈말(Peter Schmal) 독일 건축박물관장은 이런 엇갈린 외부의 시선에 대해 “서울의 모순된 상황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한 모습, 대로상의 번듯한 고층건물과 골목길의 작은 집, 상업과 주거가 뒤섞인 도시건축. 서양의 근대적 도시계획이나 건축론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투성이다. 그러나 최근 해외의 건축가와 예술가들은 이러한 서울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강남 한복판에 자리잡은 ‘플래툰 쿤스트할레’(Platoon Kunsthalle·아트홀)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시작한 서브컬처의 거점공간이다. 아스팔트 주차장에 국방색 선박 컨테이너를 쌓아 만든 이 건물은 외관부터 도발적이다. 순수예술이 포용하기 어려운 하부문화를 자극하고 소통하는 일종의 ‘문화 게릴라’를 표방한다. 그런데 베를린(2000년)에 이를 만든 독일인 톰 부셰만과 크리스토퍼 프랑크가 도쿄나 홍콩을 제치고 서울(2009년)을 아시아의 거점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양면성과 역동성 때문이라고 한다. 안정된 일본과 문화적 담금질이 필요한 중국의 중간지대로 서울이 가장 끌렸다는 것이다.
도산대로 옆에 있는 주택가가 주는 여유
서울의 양면성과 모순은 플래툰 쿤스트할레가 자리한 강남의 도시와 건축에서 잘 드러난다. 고층건물이 도열한 도산대로와 언주로에서 한 켜만 들어가면 중층의 상업건축과 단층 주택가가 아직 남아 있다. 길과 건축이 하나의 단위로 구성된 유럽의 블록형 도시조직과 극명히 대비되는 독특한 구조다. 도시공간의 효율성으로 보면 불합리하지만 서울의 다채로운 일상은 여기서 펼쳐진다. 점심시간이면 대로변 고층건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뒷골목을 찾는다. 신사동의 가로수길, 반포동의 서래마을 길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도 같은 맥락. 주변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와 도시 이면의 작은 건축이 충돌하는 지점에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는 신선한 공간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북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이른바 ‘집장사’들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집터를 잘게 나눠 도시형 한옥촌을 지었는데, 그 진면목은 건물 하나하나의 역사적 가치보다는 집과 길이 만드는 질서와 그 주변에 들어서는 전통과 현대를 접목한 새로운 건축물들에서 볼 수 있다.
서울을 최고의 도시로 보는 이유는 과거와 현재의 충돌, 크고 작음의 충돌, 고급예술과 일상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혼돈과 어설픔이 오히려 혁신의 조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건축가들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스타일을 추구하는 근대주의 건축을 비판하고, 독특한 지역성에서 아이디어를 찾는 상황적 건축설계 방법에 흥미를 갖고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도시의 양면성은 삶이 그만큼 역동적이라는 방증이다. ‘뉴욕타임스’는 서울을 소개하면서 숯불갈비집의 너저분한 장면을 올렸다. 매끈하게 단장한 대로상의 고층건물이나 가로시설물보다 도시 이면의 허름한 건축에 집중했다. 일사불란한 도시계획과 깨끗한 거리로 이름난 싱가포르가 예술의 둥지로 각광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갓난아이’와 ‘노인’이 없는 도시
그렇다면 서울이 최악의 도시로 비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한국을 ‘아파트 공화국’이라며 신랄하게 파헤쳤듯 우리 도시의 부정적 이미지 1순위는 아파트다. 아파트의 모양이 성냥갑처럼 단순하고 주변 경관을 병풍처럼 막고 있어서 최악이라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모순을 가장 빨리 지워버리는 지우개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높은 담으로 에워싸인 대규모 단지를 만들기 위해 도시의 세포인 길과 집들을 깨끗이 지우는 것이 문제다.
도시의 변화는 사람의 성장과 비슷하다. 갓난아이도 있고, 사춘기의 청소년도 있고, 노인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재개발이나 재건축 같은 대규모 사업은 이미 성장한 청년들을 한 번에 모아놓은 군대와 같다.
더 많은 사람에게 집을 주고자 주거 환경을 개선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약하다. 기존 세대 수와 입주 세대 수의 비율이 재개발은 1대 1이고, 재건축은 1대 1.2인 것만 봐도 (수적으로 집이 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사업이 진행될수록 원주민은 삶이 개선되지 않을 뿐 아니라 도시 외곽으로 밀려난다.
나 홀로 아파트나 다세대 주택이 도시의 흉물이 되기 쉽고, 체계적 도시 관리를 어렵게 한다는 이유로 2000년 이후 우리나라는 ‘지구단위 계획’이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넓은 도시 지역을 사전에 계획하고 체계적으로 개발을 하자는 취지였다. 그 결과 도시건축의 규모가 서서히 커졌다. 더구나 공공부문의 일괄계약 방식(턴키제도), 민간부문의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의 도입은 계획, 설계, 시공, 관리를 묶음으로써 도시개발의 덩치를 더욱 키웠다. 이제 대규모 도시개발은 부메랑이 돼 우리 도시를 건조하고 진부하게 만들고 있다.
최고든, 최악이든 외국인이 피상적으로 우리 도시에 잣대를 들이대는 데 지나친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외국 관광객을 위해 도시를 계획하고 집을 짓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양한 삶을 포용하는 곳에는 자연스레 사람들이 몰려 새로운 문화를 생산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층건물이 즐비한 상업지역도 정돈된 신도시도 아닌 이질적인 것들이 충돌하는 중간지대에서 기존 질서에 진동을 주는 혁신적 문화가 움튼다. 서울을 최고의 도시로 보는 사람은 작지만 혁신적인 건축을 찾아냈기 때문이며, 최악의 도시로 보는 사람은 거대하지만 진부한 건축이 앞을 가려 이를 보지 못한 것이다.
한국이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룩한 경제적 성과는 눈부셨다. 이러한 고도성장을 떠받치는 한 축이 건설산업이었다. 2007년 우리나라 건설투자 비율은 1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인 독일, 미국,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일본보다 6~8% 이상 높다.
그러나 앞으로 한국의 산업구조가 선진국처럼 제조업에서 서비스 중심으로 전환하려면, 건설산업 역시 양 중심에서 기술과 디자인을 결합한 문화 콘텐츠로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산업화 시대의 ‘건설 신화’만 여전히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새 것과 큰 것에 대한 맹신, ‘다름’을 용납하지 않는 ‘우리’만의 질주에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국립현대미술관의 ‘메가시티 네트워크 : 한국현대건축 서울전’ 특별강연을 위해 1월 내한한 피터 슈말(Peter Schmal) 독일 건축박물관장은 이런 엇갈린 외부의 시선에 대해 “서울의 모순된 상황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한 모습, 대로상의 번듯한 고층건물과 골목길의 작은 집, 상업과 주거가 뒤섞인 도시건축. 서양의 근대적 도시계획이나 건축론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투성이다. 그러나 최근 해외의 건축가와 예술가들은 이러한 서울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강남 한복판에 자리잡은 ‘플래툰 쿤스트할레’(Platoon Kunsthalle·아트홀)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시작한 서브컬처의 거점공간이다. 아스팔트 주차장에 국방색 선박 컨테이너를 쌓아 만든 이 건물은 외관부터 도발적이다. 순수예술이 포용하기 어려운 하부문화를 자극하고 소통하는 일종의 ‘문화 게릴라’를 표방한다. 그런데 베를린(2000년)에 이를 만든 독일인 톰 부셰만과 크리스토퍼 프랑크가 도쿄나 홍콩을 제치고 서울(2009년)을 아시아의 거점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양면성과 역동성 때문이라고 한다. 안정된 일본과 문화적 담금질이 필요한 중국의 중간지대로 서울이 가장 끌렸다는 것이다.
도산대로 옆에 있는 주택가가 주는 여유
서울의 양면성과 모순은 플래툰 쿤스트할레가 자리한 강남의 도시와 건축에서 잘 드러난다. 고층건물이 도열한 도산대로와 언주로에서 한 켜만 들어가면 중층의 상업건축과 단층 주택가가 아직 남아 있다. 길과 건축이 하나의 단위로 구성된 유럽의 블록형 도시조직과 극명히 대비되는 독특한 구조다. 도시공간의 효율성으로 보면 불합리하지만 서울의 다채로운 일상은 여기서 펼쳐진다. 점심시간이면 대로변 고층건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뒷골목을 찾는다. 신사동의 가로수길, 반포동의 서래마을 길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도 같은 맥락. 주변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와 도시 이면의 작은 건축이 충돌하는 지점에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는 신선한 공간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북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이른바 ‘집장사’들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집터를 잘게 나눠 도시형 한옥촌을 지었는데, 그 진면목은 건물 하나하나의 역사적 가치보다는 집과 길이 만드는 질서와 그 주변에 들어서는 전통과 현대를 접목한 새로운 건축물들에서 볼 수 있다.
서울을 최고의 도시로 보는 이유는 과거와 현재의 충돌, 크고 작음의 충돌, 고급예술과 일상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혼돈과 어설픔이 오히려 혁신의 조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건축가들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스타일을 추구하는 근대주의 건축을 비판하고, 독특한 지역성에서 아이디어를 찾는 상황적 건축설계 방법에 흥미를 갖고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도시의 양면성은 삶이 그만큼 역동적이라는 방증이다. ‘뉴욕타임스’는 서울을 소개하면서 숯불갈비집의 너저분한 장면을 올렸다. 매끈하게 단장한 대로상의 고층건물이나 가로시설물보다 도시 이면의 허름한 건축에 집중했다. 일사불란한 도시계획과 깨끗한 거리로 이름난 싱가포르가 예술의 둥지로 각광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갓난아이’와 ‘노인’이 없는 도시
독일인이 강남구에 복합문화시설인 ‘플래툰 쿤스트할레’를 만든 이유는 서울에서 역동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시의 변화는 사람의 성장과 비슷하다. 갓난아이도 있고, 사춘기의 청소년도 있고, 노인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재개발이나 재건축 같은 대규모 사업은 이미 성장한 청년들을 한 번에 모아놓은 군대와 같다.
더 많은 사람에게 집을 주고자 주거 환경을 개선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약하다. 기존 세대 수와 입주 세대 수의 비율이 재개발은 1대 1이고, 재건축은 1대 1.2인 것만 봐도 (수적으로 집이 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사업이 진행될수록 원주민은 삶이 개선되지 않을 뿐 아니라 도시 외곽으로 밀려난다.
나 홀로 아파트나 다세대 주택이 도시의 흉물이 되기 쉽고, 체계적 도시 관리를 어렵게 한다는 이유로 2000년 이후 우리나라는 ‘지구단위 계획’이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넓은 도시 지역을 사전에 계획하고 체계적으로 개발을 하자는 취지였다. 그 결과 도시건축의 규모가 서서히 커졌다. 더구나 공공부문의 일괄계약 방식(턴키제도), 민간부문의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의 도입은 계획, 설계, 시공, 관리를 묶음으로써 도시개발의 덩치를 더욱 키웠다. 이제 대규모 도시개발은 부메랑이 돼 우리 도시를 건조하고 진부하게 만들고 있다.
최고든, 최악이든 외국인이 피상적으로 우리 도시에 잣대를 들이대는 데 지나친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외국 관광객을 위해 도시를 계획하고 집을 짓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양한 삶을 포용하는 곳에는 자연스레 사람들이 몰려 새로운 문화를 생산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층건물이 즐비한 상업지역도 정돈된 신도시도 아닌 이질적인 것들이 충돌하는 중간지대에서 기존 질서에 진동을 주는 혁신적 문화가 움튼다. 서울을 최고의 도시로 보는 사람은 작지만 혁신적인 건축을 찾아냈기 때문이며, 최악의 도시로 보는 사람은 거대하지만 진부한 건축이 앞을 가려 이를 보지 못한 것이다.
한국이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룩한 경제적 성과는 눈부셨다. 이러한 고도성장을 떠받치는 한 축이 건설산업이었다. 2007년 우리나라 건설투자 비율은 1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인 독일, 미국,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일본보다 6~8% 이상 높다.
그러나 앞으로 한국의 산업구조가 선진국처럼 제조업에서 서비스 중심으로 전환하려면, 건설산업 역시 양 중심에서 기술과 디자인을 결합한 문화 콘텐츠로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산업화 시대의 ‘건설 신화’만 여전히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새 것과 큰 것에 대한 맹신, ‘다름’을 용납하지 않는 ‘우리’만의 질주에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