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지방선거에 앞서 인천 계양구청장 후보 경선에서 탈락한 후보 지지자들이 한나라당 당사앞에서 재심청구를 요구하고 있다.
이전 지방선거와 비교할 때 이번에 가장 눈에 두드러지는 점은 각 당의 공천 방식 개정 움직임이다. 흥미롭게도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추진하는 공천제도 개정 방식은 대체로 유사하다. 한나라당은 국민공천 배심원제, 민주당은 시민공천 배심원제를 새로운 공천 방식으로 추진하고 있다. 명칭도 유사하지만 공천 과정에 배심원을 도입하겠다는 취지도 비슷하다. 한나라당은 당에서 선정한 후보들의 적격 여부를 배심원들이 판단하도록 하겠다는 것이고, 민주당은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당 공천심사위원회에서 추천한 후보자들 간의 토론과 정책을 지켜본 뒤 그중 한 명을 배심원 투표로 선정하게 했다.
한나라당 배심원단이 부적격자를 ‘걸러내는’ 구실을 한다면, 민주당의 배심원단은 최적 후보를 ‘골라내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양당이 추진하는 공천 배심원제는 과거 당이 독점해온 공천 과정에 다수의 시민과 전문가 등 외부인사를 참여시켜 이들을 피겨스케이팅이나 체조 경기의 심판관처럼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부적격자 걸러내고 최적 후보 골라낸다
여기서 갖게 되는 의문점은 굳이 왜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우리에게 낯선 배심원제라는 방식을 각 정당이 경쟁적으로 도입하려고 할까 하는 점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그동안 우리 정당이 실시해온 공천 방식 변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정당정치에서 공천 방식이 획기적으로 변화한 시점은 2002년이다. 그전까지 각 정당의 후보 공천은 ‘3김’ 같은 정당 보스와 그 측근에 의해 독단적이고 폐쇄적으로 이뤄졌다. 일단 공천을 받기만 하면 그 후보는 3김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 선거구에서 손쉽게 당선될 수 있었다.
그러나 3김의 정치적 퇴장과 함께 정당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한편으로는 지지층을 결집하고 확대할 새로운 방안의 필요성이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천년민주당이 도입한 국민참여경선은 많은 유권자의 주목을 받았다. 국민참여경선은 과거의 공천 관행에서 탈피해 일반 국민에게 후보 선출 권한을 개방하겠다는 대담한 시도였다. 이러한 실험은 ‘3김식’ 보스 정치에 식상한 국민에게 매우 참신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많은 이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냈다.
당시 국민참여경선 선거인단은 모두 7만명으로 구성했는데, 20%는 당 대의원, 30%는 일반 당원에게 배정했고 나머지 50%는 일반 국민 중 공모를 통해 참여하도록 했다.
이러한 새로운 제도의 도입은 노무현 돌풍과 대선 승리로 이어지면서 그 위력을 과시했다. 2007년 대선에서는 민주당뿐 아니라 한나라당도 국민참여경선 방식을 벤치마킹한 형태로 당내 경선을 실시해 대통령 후보를 선출했다. 이보다 앞선 2006년 지방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은 당내 서울시장 후보를 국민참여경선 방식으로 선출했다.
이처럼 전국을 하나의 선거구로 삼는 대통령 후보 선출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시장 후보 선출에서도 개방적인 국민참여경선이 공천 방식으로 사용된 것이다. 2002년의 경험으로 각 정당은 이제 개방적인 상향식 공천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조류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선거구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곳에서 실시된 상향식 후보 선출은 예상외로 적지 않은 문제를 낳기도 했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 선출 과정에서도 개방형 방식이 여러 문제를 낳았지만, 상대적으로 유권자의 관심이 떨어지는 지방선거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났다.
경선 과정에서 돈과 조직에 의한 동원이 횡행했고, 해당 지역구의 당원협의회 의장이나 지역 국회의원이 영향력을 행사한 사례도 적지 않았으며, 심지어 금품 거래를 통해 공천을 ‘사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그나마 경선 과정이 공정하게 이뤄진 경우에도 이념적으로 경도된 소수의 당내 활동가의 적극적 움직임 때문에 지역 유권자의 정서와 동떨어진 인물이 후보자로 뽑히는 일도 생겼다. 정당 보스가 사실상 혼자 결정하던 방식에서 갑자기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개방 형태로 바뀌면서 여러 부작용이 생겨났던 것이다.
친박연대는 ‘폐쇄적 공천’ 부산물
17대 총선에서 혼란을 경험한 뒤 18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은 모두 개방형 방식을 접고 공천심사위원회라는 폐쇄적인 형태로 회귀했다. 소수의 외부인사가 공천심사위원회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당시 공천은 당 지도부가 주도했고 그 때문에 밀실 공천이라는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당 내부적으로는 계파별 이해관계가 부딪치면서 후보 선정 절차의 공정성을 두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한나라당에서 떨어져나온 친박연대는 바로 이런 폐쇄적 공천 방식의 부산물이다.
따라서 각 정당으로서는 지역구의 규모가 충분히 크지 않은 경우에 완전개방형 공천 방식의 부작용을 우려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공천심사위원회 방식으로 후보를 공천하면 밀실에서 이뤄진 공천이라는 여론의 비판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현재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추진하는 공천 배심원제는 이런 점에서 현실적인 고민이 담긴 개선책 모색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즉 완전 개방과 소수 독점이라는 양극단의 방식을 경험하고 난 뒤 그 중간의 개방성과 관리 가능한 수준의 참여라는 절충점을 찾고자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양당의 새로운 정치 실험은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 양당 모두 제한적인 수준에서 이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지만, 이번 지방선거에서 좋은 결과와 긍정적 평가를 얻는다면 앞으로 확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가 의도한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주의할 점도 적지 않다. 영미식 법원에서 사용되는 배심원제도는 건전한 시민의 상식을 전제로 한다. 마찬가지로 공천 배심원제도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 조건은 배심원 선정의 공정성과 이들의 판단의 독립성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일 것이다.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이들의 양식과 자질에 대한 존중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배심원의 구성이 당내 특정 파벌이나 특정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거나 당 지도부의 거수기에 불과하다는 논란이 불거지면 이 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배심원을 선정할 것이며 그 결과를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한 성패의 요인이 될 것이다.
민주화 이후 정당정치를 개선하려는 여러 노력이 있었지만 여전히 뒤처진 것 중 하나가 바로 공천제도다. ‘3김 시대’를 벗어난 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우리 실정에 맞는 공천제도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공천 배심원제도는 공천권의 독점과 완전 개방 공천이라는 양극단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 우리 정당들이 모색하는 제3의 길이라는 점에서 한번 시도해볼 만한 대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