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를 캔버스 위에 확대해 그리는 작업을 해온 전상옥의 ‘무제’ 연작.
소설의 주인공으로 20대 후반의 영국 여성인 레베카는 지독한 쇼핑광.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구두를 신었는지를 일별(원스오버)하여 브랜드와 가격까지 짐작해낸다. 이는 레베카가 패션잡지의 ‘거리 패션’(패션지에서 흔히 다루는 아이템으로 길 가던 사람을 잡아놓고 어느 브랜드인지 ‘자백’받는 것)을 오랫동안 탐독하면서 갖게 된 습관이다. 미술 학도들이 미술사 책을 무작위로 펴서 작가 이름 맞히기 게임을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사실 이처럼 ‘속물스런’ 습관은 레베카만의 비밀이었는데, 세계 패션의 중심인 뉴욕 맨해튼으로 이사 간 그녀는 자기뿐 아니라 뉴요커들 모두가 이런 짓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겉으론 반갑다고 악수하거나 매우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상대방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으며 구입처와 대략(때로는 아주 정확히)의 가격을 한순간에 알아본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호, 이 재킷은 이번 시즌의 폴 스미스, 스커트는 헬레나 캐시미어, 구두는 비아 스피가, 해서 모두 1250달러쯤 되는군. 잠깐, 저 루이비통 클러치백은 품절됐는데, 혹시 LMVH에 아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허걱. 이 대목에서, 전 세계의 쇼퍼홀릭과 트렌드 세터들은 숨을 멈추었다,고 들었다. 전 세계의 쇼핑광들은, 아니 적어도 우리나라 청담동이나 압구정동의 패션 피플들 역시 ‘원스오버’를 해왔고, 이는 쇼퍼홀릭 조직의 내부 기밀이었던 것이다.
부티크나 팬시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두 사람은 초면이든, 아는 사이든 가리지 않고 첫눈에 헤어스타일과 화장법, 옷과 구두, 그리고 가방을 좍 훑는다. 일 이야기나 애인, 아이들 과외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원스오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길에서 엇갈려 지나가는 몇 초도 원스오버를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간혹 열혈 쇼퍼들은 가던 길을 되돌아와 어디서 샀는지 물어야 직성이 풀린다.
좀더 친한 사이라면 바로 ‘정답 맞혀보기’에 들어간다. 깃을 뒤집거나 가방 안을 들여다보고 라벨을 찾는다.
“그 가방 f/w ○○○디자이너지요? 디테일이 달라.”
남자라고 예외가 아니다. 부티크에서 남성 쇼퍼홀릭이나 스타일리스트들이 원스오버를 하고 신랄한 품평을 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남성들의 논리적인 원스오버는 감성적인 여성들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한 남성이 디자이너마다 다른 보라색에 대해서만 30분 가까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쇼퍼홀릭들은 원스오버를 내놓고 자랑할 만한 습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사람을 두고 옷가게의 가격표로 평가한다는 건 피폐한 감성이며 정치적으로 옳은 행위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스오버가 사람을 옷 가격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브랜드의 옷을 어떤 자리에서 입느냐는 옷에 돈을 많이 쓰는지, 쇼퍼홀릭인지를 보여주기보다 그 사람의 취향과 상식을 보여준다. 프라다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과 마르틴 마르셀라를 좋아하는 사람은 심리와 소비 습관, 취미와 교제, 심지어 인생관에서도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이는 혈액형으로 성격을 유형화하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에서 보여준 방대한 연구의 결과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는 ‘예술 작품을 소유하는 것은 그 작품에 대한 진실한 취향의 배타적인 보유자임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오늘날 패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유행이 (경제적, 문화적) 하위 계급과의 차별을 위해 만들어진다는 것이 정설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굳이 패션이나 문화적 투쟁이란 말을 쓰지 않아도 사람들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원스오버를 하면서 살아간다. 이미지의 세계에서 옷이란 너무나 많은 정보를 제공하니까 말이다. 단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스오버를 부인하고, 원스오버 당하는 것을 불쾌해하기 때문에 튀지 않는 옷차림을 선호하는 데 비해, 쇼퍼홀릭들은 기꺼이 원스오버를 감수할 뿐 아니라 즐긴다는 ‘사소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