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암에서 바라본 백암산 자락.
나그네는 운문암과 인연이 깊다. 운문암에 계시면서 선승을 지도하셨던 서옹 스님을 뵙기 위해 백암산을 오르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서옹 스님을 뵐 수 없다. 이른바 ‘좌탈입망(坐脫立亡)’앉아서 열반에 드셨기 때문이다. 다만 운문암 초입 차밭에 핀 차꽃 향기가 향기롭고, 서옹 스님께서 들려주셨던 진묵 대사 이야기만 귓가에 맴돈다.
진묵이 일곱 살에 봉서사로 출가하여 사미승이 된 뒤, 운문암으로 와서 다각의 소임을 보고 있을 때였다. 대중 스님들 중에서 가장 나이 어린 진묵이 하루는 신중단(神衆壇)에 차 공양을 했다. 그날 밤 대중 스님들이 모두 같은 꿈을 꾸었는데, 한 신중(神衆)이 나타나 말했다.
일생 동안 기인 면모 … 호남 일대 전설 산재
“우리들은 불법을 지키는 호법신인데 부처님의 예를 받으니 마음이 황공하구나. 그러니 다각의 소임자를 바꿔달라.”
다음 날 대중 스님들은 간밤의 꿈을 서로 얘기하며 의아하게 여겼다. 그런데 때마침 아랫마을에 사는 나무꾼이 일옥(一玉·진묵의 법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금 전에 부추를 뜯고 있었습니다. 그때 두 남녀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운문암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들은 대성통곡을 하며 내려왔습니다. 두 남녀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영원히 안주할 곳을 찾아 올라갔지만 일옥 스님이 맹화(猛火)로 저희들을 지져 화독(火毒)을 이겨내지 못해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대중 스님들은 진묵 대사가 불(佛)의 화신임을 깨달았다. 두 남녀가 ‘마군魔軍)’이었으므로 그들을 화광삼매(火光三昧)로 내쳤던 것이다. 마침내 대중 스님들은 암자의 불사(佛事)를 마치게 되었을 때 진묵 대사를 증명으로 삼았다. 그때 진묵 대사는 대중 스님들에게 말했다.
“내가 다시 와서 불사를 하기 전에는 불상에 손을 대지 말라.”
이후 운문암에서는 불상의 금물이 벗겨져도 개금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데, 나그네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부분은 진묵 대사가 다각의 소임을 맡으면서 부처님의 예를 받게 된 배경이다. 다각이 된 공덕으로 바로 부처가 된 경우는 진묵 대사가 최초가 아닐까 싶다. 차로써 부처가 됐으니 다선일여를 보여준 셈이다.
명종 17년(1562)에 김제 만경에서 태어나 일생 동안 기인의 면모를 보이며 유학에 밝았던 진묵 대사. 행적이 너무나 기이하여 전설로 남아버린 그는 술도 곡차라 하여 마시고는 늘 대취하여 만행했다고 전해진다.
진묵 대사는 술을 마셔도 술에 걸리지 않았던 것일까. 술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깨어 있음을 잃지 않는다는 뜻일 터다. 그렇다면 그에게 술은 차나 다름없었으리라. 그래서 그는 술을 곡차(穀茶)라 했던 것일까. 술에 취하여 부른 그의 노래도 깨달음의 세계다.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 삼아/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만들어/ 크게 취해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도리어 긴 소맷자락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하노라.
그는 이승의 인연이 다한 날 개울물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시자에게 말했다. “이것이 석가불의 그림자니라.” “그것은 스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러자 그는 “너는 고작 내 가짜 그림자만 알았지 석가의 참그림자는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한 뒤 방으로 들어가 홀연히 입적해버렸다. 이로써 그는 72세의 일생을 마치게 된 것이었다.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나들목으로 나와 백양사 산문으로 들어 3km 정도 산길을 오르면 운문암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