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일 이희범 산자부 장관실을 찾아가 단식농성을 했던 김종규 부안군수(가운데).
일본도 롯카쇼무라에 방폐장을 짓기 전까지는 상당한 홍역을 치렀다. 그러나 한국처럼 격렬한 시위는 치르지 않고 10여년 만에 결론을 내렸다. 한국은 일본과 달리 일부 정치인과 언론이 반(反)핵폐기장 운동에 동조함으로써 시위를 키운 측면이 있다.
최초의 반핵폐기장 시위는 1989년 경북 영덕·영일·울진에서 일어났다. 당시 정부는 세 지역을 상대로 방폐장을 지어도 되는지에 대한 지질조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알음알음으로 새나갔다.
“군민 희생, 부안 발전 전략 세워달라”
그해 10월 국회 대정부 질의에 나선 H 의원이 “동해안에서 지질조사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핵폐기장을 짓기 위한 것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답변에 나선 장관은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 “그렇다”라고 대답했는데 이튿날 언론들이 크게 보도하면서 바로 시위가 발생했다.
1990년 과기처 산하의 원자력연구소는 당시 충남지사인 S 씨와 안면도에 방폐장을 짓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그해 10월 과기처에 출입하는 모 신문 기자가 안면도에 특별한 표시가 되어 있는 지도를 보고, ‘안면도에 핵 폐기장이 들어선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그로 인해 격렬한 ‘안면도 사태’가 벌어져 과기처 장관이 사퇴하면서 방폐장 선정은‘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정부는 ‘국민 수용’이 중요하다면서 유치 공모를 시작했다. 방폐장을 유치하는 지역에 대해서는 지원을 하겠다는 방안을 마련한 것. 그리하여 95년 굴업도가 그 후보지로 선정됐는데, 굴업도 주민들은 지원책 때문인지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인천 등 굴업도 인근 지역에서 강한 반대가 터져나와 굴업도 건도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2003년 산자부가 여러 특혜조건을 내걸고 방폐장 신청을 받았을 때 가장 적극적인 곳이 군산이었다. 그러나 군산은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소를 지을 곳으로 마땅치 않다는 결과가 나와 후퇴하고 대신 부안군이 신청을 했다. 그러나 부안 역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나 신청을 한 군수가 주민들로부터 뭇매를 맞아 입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여당 의원이던 J 씨는 김 군수를 비난하는 발언을 했다. 국가적으로 방폐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지역 정서에 맞춰버린 것.
그러나 김 군수가 여느 정치인과 다르게 소신을 갖고 방폐장을 유치하려고 한 것은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방폐장을 위험하다고만 보던 국민 시각을 방폐장을 유치하면 지역을 발전시킬 수도 있다는 것으로 바꿔놓았다.
부안군은 2005년 방폐장 신청이 시작되었을 때 군의회 의견이 6대 6으로 갈리는 바람에 신청을 하지 못했다. 방폐장 신청이 마감된 이튿날 김 군수는 이희범 산자부 장관실을 찾아가 4박5일간 단식농성을 했다. 방폐장 신청을 하지 못했지만 부안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 이 장관은 이러한 김 군수를 박절하게 대하지 못하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19년 동안 표류해온 방폐장 유치의 물꼬를 터놓은 김 군수는 10월28일, 모든 것을 잊은 듯 부안 축제를 진행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의 말이다.
“국가적 난제인 방폐장 문제가 풀리게 된 것을 환영한다. 방폐장 유치가 경쟁 구도로 이뤄질 수 있었던 데는 부안군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정부는 이를 고려해 부안군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강력한 전략을 내놓았으면 한다. 정부가 부안을 발전시킬 방안을 내놓을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확실히 힘 있는 국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