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9일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열린 개산대제에 참석해 108배를 하고 있는 황일숙 씨.
황 씨는 능숙한 솜씨로 산 낙지를 손질했다. 이 후보와 참모들은 일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황 씨가 손질한 낙지를 안주로 이 후보와 측근들은 패배의 아픔을 달래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분위기를 띄우며 산 낙지를 손질하던 황 씨의 눈에도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청와대 근무로 평생 첫 월급 받아온 날 ‘눈물 펑펑’
이번 선거에 패한 이 후보의 역대 전적은 5전5패. 10·26 재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이 후보가 가장 많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배경이다. 이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많지 않음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9월 한 사석에서 그는 “가능성이 없다고 발을 뺄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렇지만 5패가 확인된 순간 이 후보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특히 이 후보가 패할 때마다 곁에서 그를 지켜준 황 씨 역시 이번 선거의 패배가 주는 충격만큼은 적지 않은 눈치다. 한 측근의 설명이다.
“이번에는 분위기가 좋았다. 지난번에는 손을 내밀면 유권자들이 달아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먼저 달려와 손을 잡았고, 사모님(황 씨)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해 어느 때보다 기대를 했다.”
수십 년간 정치인 남편을 내조한 황 씨는 정치의 비정함을 경험으로 체득했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와 타협이지만, 선거는 제로섬게임으로 ‘2등’의 존재는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도 누구보다 잘 안다. 그 때문에 낙선했을 때 이 후보와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충격이 어느 정도일지, 또 언제까지 가슴앓이를 하게 될지를 체험을 통해 알고 있다.
황 씨는 정치인의 아내지만 정치가 부담스럽고 힘겨운 눈치다. 황 씨는 이 후보가 출마할 때마다 무방비 상태에서 ‘1등만이 살아남는 정글이 주는 스트레스’에 그대로 노출됐다. 9월 이 후보가 대통령시민사회수석비서관 자리를 버리고 출마를 선언했을 때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그의 대구행을 말린 것도 이 때문이다. 지근거리에서 황 씨를 보좌한 한 측근의 설명이다.
“2월 이 후보가 대통령시민사회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된 뒤 난생 처음 황 씨에게 월급봉투를 가져다주었다. 이 후보가 가져다준 월급봉투를 받은 황 씨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대구 동을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한 열린우리당 이강철 후보(오른쪽)가 아내 황일숙 씨와 함께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
이 후보를 만나기 전 황 씨는 정치에 대해 아는 바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1990년 첫 아내와 사별한 이 후보가 황 씨를 만난 것은 93년. 당시 민주당 지구당 위원장직을 맡고 있던 이 후보가 건넨 명함을 보고 황 씨가 던진 첫 번째 질문은 “지구당 위원장이 뭐하는 사람인가”였다.
이 후보는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돈을 벌기보다 집 안에 있는 것을 남에게 퍼주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낙천적 기질은 내조를 해야 하는 아내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1986년, 초등학교 교사였던 이 후보의 첫 아내는 위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 이 후보가 한 사석에서 한 말이다.
“남편이란 사람이 돈 벌 생각은 하지 않고 허구한 날 도망이나 다니고 정보기관과 경찰에서 연일 학교를 찾아가 남편의 행방을 알려달라고 윽박지르니….”
아내가 위암 말기 선고를 받던 그때 이 후보는 수배 중이었다. 후배들의 007 연락 작전으로 수술 직전 아내와 눈물의 상봉을 했다. 상봉이 끝난 뒤 그는 곧바로 정보기관으로 끌려갔다. 그 후 4년간의 사투 끝에 이 후보의 아내는 90년 눈을 감았다. 훗날 이 후보는 “정치 한다고 가정을 돌보지 않은 내 탓”이라고 자책했다. 하지만 이 후보의 생활 방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 싹은 황 씨와의 신혼생활 때부터 엿보였다. 결혼 전 이 후보는 “장모를 내가 모시겠다”고 호언을 했다. 그러나 살 집을 마련할 돈이 없던 이 후보 부부는 처가에 들어가 살았다. 그렇게 장모를 모시고 살던 이 후보는 얼마 뒤 선배의 도움을 받아 신혼집을 마련했다. 여기에도 혹이 붙었다. 마땅히 살 곳이 없던 후배가 방 하나를 차지하고 눌러앉은 것. 이사한 첫날 대구 중부경찰서 정보과에 근무하는 한 형사는 난을 보내 신혼생활을 격려(?)했다. 이 후보의 신혼집에 김근태(현 복지부 장관)이 와서 하룻밤 자고 간 것을 경비원이 경찰에 알린 뒤부터 이 후보 집은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황 씨는 이런 식으로 대구 재야인사들의 후원자로 활동했다. 황 씨는 결혼 전 부산 봉생병원의 수간호사였다. 결혼하고는 옷가게를 차려 생계를 유지했다.
96년 15대 총선 때 이 후보가 출마를 선언했다. 세 번째 도전이었다. 황 씨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가게를 정리해 선거 비용을 댔다. 결과는 참패였다. 선거가 끝난 뒤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현수막, 인쇄물, 사무실 임대료, 사무실 전화요금 등 빚이 8000만원이 넘었다. 빚을 갚기 위해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고, 남은 돈과 주변의 도움으로 횟집을 차렸다. 이 후보를 아는 사람들이 찾아주면서 장사가 쏠쏠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황 씨는 주방장에게 산 고기의 목을 치는 방법을 배웠다. 이곳에서도 이 후보는 이방인이었다. 칼질도 서툴고 ‘뻣뻣해’ 손님 응대도 불가능했다. 결국 주차관리가 그의 몫으로 떨어졌다. 1년 후 황 씨는 빚 대부분을 갚을 정도로 장사 수완을 발휘했다.
그러나 IMF 한파가 몰아치면서 횟집 장사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1년 말, 횟집을 정리했다. 횟집을 정리한 자금 대부분은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의 경선 및 대선 자금으로 들어갔다. 황 씨로서는 속이 탈 일.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나마 남은 돈으로 전세, 사글세로 이사를 다녔다. 서울로 부산으로 선거 때문에 돌아다니던 이 후보가 이사한 집을 찾기란 애초 불가능한 일. 그럴 때면 이 후보는 어김없이 “우리 집이 어데고”라며 황 씨에게 전화를 했다. 2002년 대선 때 이 후보는 그야말로 자신과 관련 있는 대구·경북의 모든 조직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황 씨는 대구 수성갑 여성부장직을 맡았다. 이 후보가 명진 스님, 박병기 신부 등 대구의 노무현 선거운동원들과 함께 성바오로 성당의 바오로관에서 모였다. 이날 참석했던 명진 스님의 전언이다. “그날 이강철이 뜬금없이 ‘마누라가 한 명이어서 참 다행이다. 두 명이면 한 명 팔아서 노무현 갖다줄 것’이라고 말해 모두가 배를 잡고 웃었다.”
황 씨도 이 후보의 이 얘기를 전해들었다.
선거가 끝난 직후인 27일 3시. 이 후보와 황 씨는 사무실에서 해단식을 했다. 이 자리에서 사무실 식구들은 “열린우리당의 전국정당화를 위해 이 후보가 다시 도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 씨로서는 듣고 있기 힘든 얘기다. 그들의 진정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지난한 세월, 감당해야 할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후보는 선거 패배 후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고 있다. 황 씨는 또 한동안 가슴앓이를 하는 남편을 지켜봐야 한다. 그 또한 부담이다. 그 과정에서 황 씨는 내일에 대한 스케줄도 짜야 한다.
“남편의 여섯 번째 도전을 묵묵히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 정도면 됐다’며 주저앉힐 것인가.”
정치 내조에 진력이 난 황 씨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결정하기 힘들 것 같다. 10월9일 황 씨는 팔공산 동화사에서 열린 개산대재(開山大齋)에 참석, 남편의 당선을 기원하며 108배를 했다. 조만간 황 씨는 또 동화사를 찾아 고단한 몸을 의탁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