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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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주부가 부엌데기냐?

  • 이인모 기자 imlee@donga.com

    입력2005-11-07 0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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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업주부가 부엌데기냐?

    마리 테레스 크뢰츠-렐린 엮음/ 김라합 옮김/ 웅진 지식하우스 펴냄/ 264쪽/ 1만원

    ‘주부와 돼지, 혁명을 꿈꾸다’는 주부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주부들은 하루 종일 집안일에 매여 힘들고 바쁜 일상을 보내지만 남편과 다른 가족들에게서 일한 만큼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주부들의 마음속에는 억울함과 불만이 쌓여 있다. 그렇다고 이런 심정을 여기저기에 호소하지도 못한다. 단지 같은 처지에 있는 주부를 만났을 때 속마음을 내보이며 하소연할 뿐이다. 이 책에 소개된 이야기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휴가도 없고 사표도 못 쓰는 주부들의 속 터지는 이야기 모음집인 셈이다.

    이 책의 필자들은 대부분 독일의 주부들이다. 그런데도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우리나라 주부들의 이야기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다. 주부들의 고달픈 일상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임을 보여준다.

    책을 엮은 마리 테레스 크뢰츠-렐린은 잘나가던 배우였다. 7세에 데뷔해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독일을 오가며 영화와 TV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21세 때 독일의 유명 극작가이자 연극연출가인 프란츠 크사버 크뢰츠와 결혼하면서부터 그녀는 배우가 아닌 전업주부로 살았다. 10여년 동안 아이 셋을 낳아 기르며 살림하고, 까다로운 남편 뒷바라지까지.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삶과 주부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주부혁명닷컴’이라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전업주부들의 대변자가 됐다. 그 후 많은 주부들이 주부혁명닷컴에 주부로서의 삶과 애환에 관한 글을 실었고, 이 글들이 바로 ‘주부와 돼지, 혁명을 꿈꾸다’의 밑거름이 됐다.

    책은 제목부터 흥미롭다. ‘왜 주부와 돼지를 하나로 묶었을까? 주부와 돼지가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러나 주부와 돼지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도 무려 9개씩이나….

    △팔자가 좋아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깨끗한 걸 좋아하면서, 더러운 곳에 살 수밖에 없다 △스트레스에 짓눌려 있다 △사실은 똑똑하다 △새끼들에게 헌신한다 △자신의 매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아플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현명해진다 △의외로 혼자 있을 때가 많다.



    책의 구성은 이 9개의 공통점을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자녀 양육, 집안일의 고충 등 주부로서의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성생활과 생리 등 말 못할 고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엄마는 진이 다 빠졌다. 10분간 소파에 눕는다. 좀 살 것 같다. 그 순간 초인종이 울린다. 엄마는 잠에 취해 비틀거리며 현관으로 간다. “낮잠 주무셨나 봐요? 거 참, 주부들은 팔자도 좋다니까요” -‘주부들은 팔자가 좋아?’ 중에서

    가방 꾸리기. 휴가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을까. 그럼 엄마는? 아, 엄마는 아주 간소하다. 엄마는 아이들 짐을 다 챙기고 남은 가방 구석자리에 보잘것없는 물건 두어 가지를 쑤셔넣는다. - ‘주부에게 휴가는 특근’ 중에서

    어떤 엄마가 생리 중이라는 이유로 다달이 나흘씩 베이비시터를 쓰면 주위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주부도 생리휴가가 필요하다’ 중에서

    마리 테레스 크뢰츠-렐린은 주부를 만능재주꾼으로 비유했다. 아내, 어머니, 연인, 청소부, 요리사, 간호사, 정원사, 운전사, 이벤트 진행자, 가정교사, 비서, 정신과 의사, 실내 장식가, 회계사 등 한 가정에서 주부가 하는 일은 실로 엄청나다. 그럼에도 주부에 대한 대우는 형편없다. 24시간 노동에 자유시간은커녕 봉급도 전혀 없고, 재취업의 기회는 하늘의 별 따기다. 또한 노후 보장이나 연금도 불투명하다. 일반 노동자라면 파업이 수십 차례는 벌어졌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도 주부들에게 고마운, 또는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 남편이나 자녀들은 아내와 어머니의 노고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부는 공기나 물 같은 존재가 아닐까. 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고마움을 모르지만 막상 제자리에 없다면 남은 사람들은 삶을 지탱하기가 어려울 테니 말이다. 우리 모두 전업주부들에게 고마워하자! 그리고 주부님들,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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