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테레스 크뢰츠-렐린 엮음/ 김라합 옮김/ 웅진 지식하우스 펴냄/ 264쪽/ 1만원
이 책의 필자들은 대부분 독일의 주부들이다. 그런데도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우리나라 주부들의 이야기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다. 주부들의 고달픈 일상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임을 보여준다.
책을 엮은 마리 테레스 크뢰츠-렐린은 잘나가던 배우였다. 7세에 데뷔해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독일을 오가며 영화와 TV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21세 때 독일의 유명 극작가이자 연극연출가인 프란츠 크사버 크뢰츠와 결혼하면서부터 그녀는 배우가 아닌 전업주부로 살았다. 10여년 동안 아이 셋을 낳아 기르며 살림하고, 까다로운 남편 뒷바라지까지.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삶과 주부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주부혁명닷컴’이라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전업주부들의 대변자가 됐다. 그 후 많은 주부들이 주부혁명닷컴에 주부로서의 삶과 애환에 관한 글을 실었고, 이 글들이 바로 ‘주부와 돼지, 혁명을 꿈꾸다’의 밑거름이 됐다.
책은 제목부터 흥미롭다. ‘왜 주부와 돼지를 하나로 묶었을까? 주부와 돼지가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러나 주부와 돼지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도 무려 9개씩이나….
△팔자가 좋아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깨끗한 걸 좋아하면서, 더러운 곳에 살 수밖에 없다 △스트레스에 짓눌려 있다 △사실은 똑똑하다 △새끼들에게 헌신한다 △자신의 매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아플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현명해진다 △의외로 혼자 있을 때가 많다.
책의 구성은 이 9개의 공통점을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자녀 양육, 집안일의 고충 등 주부로서의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성생활과 생리 등 말 못할 고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엄마는 진이 다 빠졌다. 10분간 소파에 눕는다. 좀 살 것 같다. 그 순간 초인종이 울린다. 엄마는 잠에 취해 비틀거리며 현관으로 간다. “낮잠 주무셨나 봐요? 거 참, 주부들은 팔자도 좋다니까요” -‘주부들은 팔자가 좋아?’ 중에서
가방 꾸리기. 휴가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을까. 그럼 엄마는? 아, 엄마는 아주 간소하다. 엄마는 아이들 짐을 다 챙기고 남은 가방 구석자리에 보잘것없는 물건 두어 가지를 쑤셔넣는다. - ‘주부에게 휴가는 특근’ 중에서
어떤 엄마가 생리 중이라는 이유로 다달이 나흘씩 베이비시터를 쓰면 주위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주부도 생리휴가가 필요하다’ 중에서
마리 테레스 크뢰츠-렐린은 주부를 만능재주꾼으로 비유했다. 아내, 어머니, 연인, 청소부, 요리사, 간호사, 정원사, 운전사, 이벤트 진행자, 가정교사, 비서, 정신과 의사, 실내 장식가, 회계사 등 한 가정에서 주부가 하는 일은 실로 엄청나다. 그럼에도 주부에 대한 대우는 형편없다. 24시간 노동에 자유시간은커녕 봉급도 전혀 없고, 재취업의 기회는 하늘의 별 따기다. 또한 노후 보장이나 연금도 불투명하다. 일반 노동자라면 파업이 수십 차례는 벌어졌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도 주부들에게 고마운, 또는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 남편이나 자녀들은 아내와 어머니의 노고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부는 공기나 물 같은 존재가 아닐까. 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고마움을 모르지만 막상 제자리에 없다면 남은 사람들은 삶을 지탱하기가 어려울 테니 말이다. 우리 모두 전업주부들에게 고마워하자! 그리고 주부님들,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