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5대 조부 무덤인 준경묘(위)와 5대 조모 무덤인 영경묘.
이곳은 풍수 호사가들과 아름다운 소나무 숲을 보기 위해 찾는 사람들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중 풍수 호사가들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이곳이 천하의 명당인 까닭에 그 후손이 임금이 되었으며 조선 왕조가 500년 동안 이어졌다고 믿는 ‘소신파’고, 다른 하나는 이곳이 좋은 자리이긴 하나 임금을 배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리라고 생각하는 ‘불신파’다.
현재 풍수학 발전의 걸림돌 중 하나는 고증되지 않은 현장과 각종 자료를 근거로 마치 사실인 양 이야기해 일반인들로 하여금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준경묘와 영경묘가 그런 경우인데 이곳이 명당인지, 이성계 5대조 무덤 자리가 정확히 맞는지에 대해서 고증된 것이 없는데도 마치 고증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준경묘 안내판에도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 태조를 비롯한 태종, 세종 등 역대 왕들이 선조인 이양무 묘소를 찾으려 부단히 노력했으나 진위가 분명치 않아 고심했다. 그러다 고종 때 이곳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고 했을 뿐, 태조 이후 500년 동안 실종된 무덤을 찾아냈다거나 그곳이 정확한 자리라는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고종이 이곳을 정비한 것은 1899년으로, 태조 건국 후 500년이 지난 일이어서 강산이 변해도 수십 번은 변했을 터인테 어떻게 찾았을까 의문이 든다.
무덤 터 전설 중국 명나라와 비슷
태종 이방원 역시 조상들의 능을 매우 소중히 여겨 자신의 최측근 하륜에게 함흥에 있는 선왕의 능을 직접 살피게 할 정도였으나(하륜은 이 능들을 돌아보고 오는 길에 죽었다), 이곳 삼척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었다.
더욱이 이곳을 무덤 자리로 잡게 된 전설이 중국의 전설과 비슷하다. 이성계의 4대조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사와 살던 어느 날, 산에 올랐다가 산길을 가던 고승과 동자승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노승이 동자에게‘저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손이 왕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 간청하여 쓴 명당이라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 조부의 고사와 비슷하다.
이렇듯 여러 의문점이 있음에도 마치 사실인 양 전해오는 까닭은 조선 말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될 무렵 왕실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선영을 성역화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극우 사학자들이 이성계가 여진족의 후예이므로 한국은 조선 왕조 500년간 여진족의 지배를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준경묘는 이성계가 한민족의 후예임을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물”(삼척시립박물관)이라는 대목에서도 이미 당시 일본 극우파들이 조선 왕실의 정체성을 흔들어댔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왕실 선영과 유적들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사업을 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터의 좋고 나쁨을 풍수적으로 논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다만 태조 이성계 5대조가 이곳에서 살았고, 이곳에 묻혔다는 사실이 중요할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소나무 원시림 때문이다. 특히 준경묘 일대의 울창한 송림은 `황장목(黃腸木)`과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사용했을 만큼 질이 좋고, 너무나 아름다워 찾는 이들로 하여금 찬탄을 연발하게 한다.
소나무가 100년 수령에 20~30m 높이의 원시림 형태로 지금까지 유지돼올 수 있었던 것은 조선 말 이후 왕실의 시조 묘로서의 성역화 작업 때문에 가능했다. 준경묘가 천하의 명당이라면 그 덕을 가장 많이 받는 것은 이곳 송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