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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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한 속살, 야릇한 환상

  • 권기태/ 동아일보 위크엔드팀 기자 kkt@donga.com

    입력2002-10-07 1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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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사한 속살, 야릇한 환상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에로틱한 것’. 서울 서초동 작업실에서 작품 ‘내음(氣)00041’ 앞에 선 화가 최송대씨.

    시인이자 교수인 어떤 이는 4월 초가 되면 아담하게 맺힌 목련 꽃봉오리 속에 자기 손가락을 집어넣어 보곤 한다. 그럴 때 그는 묘한 흥분을 느낀다고 했다. 꽃이 식물의 성기라는 점에 착안해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실제로 꽃은 자기증식을 할 수 있도록 암술과 수술을 갖춘 식물의 성기다. 꽃이 피면 화사하고 청초한 생명력이 워낙 극적으로 드러나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사실을 잠깐 잊게 만들 뿐이다.

    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지낸 중진 한국화가 최송대씨(59)가 최근 꽃의 이 같은 에로틱한 속성을 화폭에 담은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어 눈길을 끌었다. 붓과 함께 4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그는 소재와 색채 기법 등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왔는데 1998년부터 꽃을 ‘식물의 생식기’라는 차원에서 다뤄오고 있다. 그는 환상적인 화풍으로 꽃이파리들을 여성의 음순처럼 재구성하거나, 꽃봉오리 속에서 교접하는 암술과 수술을 극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등 ‘꽃의 에로티시즘’이라는 테마를 선정적으로 드러낸다.

    9월 초 서울 박영덕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에 들어선 이들은 벽 하나를 가득 메운 ‘내음(氣)02054’(작품이 완성된 연월일)을 보고 화들짝 놀라거나 주위에 누가 있지나 않은지 둘러보곤 했다. 관람객들은 “이거, 너무 야하다”면서도 신기해하는 반응들이었다. 흰빛과 복숭앗빛이 어우러진 화면은 광릉요강꽃잎 한가운데 복주머니란의 꽃잎이 솟아나온 장면을 재구성한 것이었는데, 꽃을 음순으로 보는 특유의 시각이 단적으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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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릉요강꽃잎과 복주머니란의 꽃잎을 재구성한 ‘내음(氣)02054’

    올해 서울 예술의전당, 2000년 서울 아미아트갤러리 등에서 열린 전시회의 출품 작품들도 마찬가지. ‘내음(氣)98111’의 경우 물봉선의 벌어진 이파리들을 통해 사람의 몸 한구석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인상을 준다.



    ‘내음(氣)98101’의 경우 흙 위에 솟아오른 수염풀을 그린 것이다. 보랏빛과 자줏빛의 어두운 공간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수염풀은 기묘하게도 화면 한가운데 있는 깊은 구멍을 향해 헤엄쳐 가는 듯해 수컷의 정자(精子)와 같은 인상을 준다.

    최씨는 이름도 모르는 떠돌이 점쟁이가 ‘꽃향기가 널리 퍼지라’는 뜻에서 지어준 ‘운향(云香)’이라는 호를 그대로 자기 이름 앞에 쓰고 있다. 그가 좋아하는 꽃은 장미 튤립 등과 같은 화사한 꽃들이 아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광릉요강꽃 개불알꽃 호박꽃 섬백리향 붓꽃 섬말나리 같은 서민적인 꽃들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운향화실에서 “특히 양란을 보면 꽃이 식물의 성기라는 암시를 보는 것 같다”며 양란의 꽃이파리들을 들춰 보였다. 이파리들은 하얗고 청초했지만 그 속에는 ‘매끈하고 길다랗고 깊숙한 타원형의 틈새’가 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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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 속의 수염풀을 그린 ‘내음(氣)98101’

    그가 꽃을 보기 위해 자주 찾는 곳은 서울 양재동 꽃마을과 우면산 정릉 도봉산 등이다. 이들 꽃을 이파리 수술 암술 꽃받침까지 샅샅이 들여다본 후에 카메라로 접사촬영하기도 한다. 이렇게 촬영한 꽃들이나 스케치한 작품들은 수백장이 넘는다.

    그는 “원래 연꽃이나 해바라기 같은 꽃들을 즐겨 그렸는데, 나이가 들수록 말이나 나체들을 통해 에로티시즘을 화폭에 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며 “그 때문인지 차츰 꽃을 이용해 환상적인 동물이나 성기를 표현하게 됐다”고 말했다.

    최씨가 자신의 독립된 화실을 마련한 것은 쉰살이 되던 해인 93년. 결혼 전 남편에게 “쉰 살이 되면 예술가로서만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는데 소원을 이룬 것이다. 이전까지는 집에서 집안일을 다 마친 다음 그림을 그렸다. 그는 “가족들을 위해 밥 국 반찬을 준비해놓지 않으면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었다”며 “하지만 쉰 살이 되고 두 딸이 다 자라 화실을 별도로 만들고 나니 날아갈 듯 행복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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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 꽃잎 등을 재구성한 ‘내음(氣)99093’

    그는 이후 아침 8시경이면 화실로 나와 하루 12시간 가량 그림을 그린다. 장지에 아교물을 여러 번 칠한 다음 조개 가루를 서너 번 바르는 기초 작업 끝에 석채 분채 수정말 등으로 수백 번씩 ‘색을 올리는’ 중노동이다. 그가 카라를 소재로 그린 ‘내음(氣) 010712’는 수백 번의 붓질을 통해 솜털까지도 표현해낸 작품이다. 한국화치고는 드문 극사실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이렇듯 중노동에 몰두하는 동안 그를 찾아오는 이는 배우러 온 제자들이나 몇 달 전 퇴직한 남편이 전부다. 남편은 그의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당신, 이렇게 야한 그림 그려도 되는 거냐?”라고 놀리듯 물었다. 최씨는 그런 남편에게 프랑스 화가 마르셀 뒤샹의 말을 들려줬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에로틱한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젊은이든 늙은이든 그 누구도 에로티시즘을 외면할 수는 없다.”

    화사한 속살, 야릇한 환상

    물봉선을 흰색 오렌지색 노란색 분홍색의 환상적인 어울림 속에 드러낸 ‘내음(氣)98111’

    그는 작고한 한국화가 내고(乃古) 박생광(1904∼1985)과 미국 여성 화가 조지 오키프(1887∼1986)를 존경한다고 했다. 둘 다 젊은 시절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가 늘그막에 자신만의 세계를 인정받은 이들이다. 오광수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최씨의 작품은 꽃을 주요 소재로 다룬 오키프의 그것을 연상시킨다”며 “오키프가 뉴멕시코 사막의 건조한 꽃의 환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면, 최씨는 눅진한 습기가 느껴지는 더욱 몽환적인 세계로 들어간 느낌을 준다”고 평했다.

    최씨는 꽃을 들여다보며 얻은 것은 “싱싱한 꽃들은 아름답지 않다는 점”이라고 했다. 그는 “늙어 빛이 바래가는 꽃들을 볼 때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을 머금곤 한다”고 말했다. 내후년이면 환갑을 맞는 그가 쓴 꽃에 대한 시는 그가 꽃을 통해 자신만의 황홀경을 찾고 있음을 드러낸다.

    ‘나는 꽃을 사랑한다/ 자연 속에 있는 꽃과 노닐다보면/ 그 속에서 내가 구하던 세상을 만날 수 있어/ 더 없이 즐겁고 더불어 하나가 되어진다/ 꽃 속에서 나는 순수의 덩어리로/ 그토록 갈망하던 내 삶의 푸르른 꿈이/ 환영으로 나타난다’.(‘꽃들의 꿈’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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