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빈 장관이 신의주 무비자 입국 개시일로 예고했던 9월30일. 신의주 진입을 위해 전날부터 중국 선양(瀋陽)과 단둥(丹東)에 모였던 사람들은 일단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신의주 도박’이 출발부터 삐걱거린 셈이었다. 양빈 장관은 신의주 무비자 입국이 공수표로 드러난 직후 “국경 통과 문제를 협의하는 데 앞으로 6개월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신의주 특구 양빈 행정장관(위)은 9월30일 신의주 무비자 입국 약속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신뢰성에 상처를 입게 됐다.
신의주 무비자 입국 실패는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중국과 북한 간 현안인 국경 통과 문제를 놓고 한쪽 당사자인 중국을 제쳐놓은 채 양빈 장관이 무비자 입국을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렸기 때문이다. 신의주 무비자 입국을 이틀 앞둔 9월28일 ‘주간동아’와 인터뷰한 단둥시 고위관계자는 양빈 장관의 무비자 선언에 대해 “중국 정부와 협의를 거치지 않은 일방적 선언”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무비자 입국 개시일인 9월30일 다음날인 10월1~7일까지는 중국의 국경절 휴일로 인해 사실상 세관업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단둥 현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런 기초적 사항도 확인하지 않은 채 깜짝쇼 형식으로 신의주 무비자 입국을 선언한 양빈 장관의 파격적인 행보를 놓고 그의 행정능력에 의구심을 갖는 전문가들도 늘어나고 있다.
신의주 경제특구 발표 이후 압록강변에서 바라본 신의주 시민들(위)과 신의주 시내(아래). 신의주 시민들은 몇 달 전에 비하면 훨씬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양빈 장관은 신의주 특구 사업에 대해 본인의 업적이라기보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업적임을 유독 강조하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홍콩 성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본인이 김정일 위원장의 양아들이 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은 최근까지도 양빈 회장에 대해 여러모로 ‘검증’을 시도했던 흔적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암스테르담 무역관 김상욱 관장은 “한 달여 전쯤 제네바 주재 북한 대리대사가 네덜란드 상공회의소 국제담당 이사를 통해 양빈 회장과 양회장의 사업체에 대해 관련자료를 요구해왔다”고 전해왔다. 또 중국 내의 한 소식통은 “주중국 북한대사관 관계자조차 양빈 장관의 발탁에 대해 ‘의외’라고 말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신의주 경제특구 발표 이후 중국 단둥 쪽에서 바라본 압록강 철교의 모습(맨 위와 중앙)과 양빈 장관이 선양 시내에 조성해놓은 네덜란드촌 풍경
이쯤 되고 보면 양빈 회장은 적어도 몇 가지 치명적 실수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우선 양회장은 신의주 경제특구가 기본적으로 북한과 중국 간의 합의를 전제로 하는 사업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단둥-신의주 간 무비자 입국이나 중국 재입국 등을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중국 정부와의 사전조율이 필수적임에도 양장관은 이를 무시한 채 ‘과속’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현재 양빈 장관의 행보에 대해 일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단둥시 관계자는 “2년 전에도 어우야[歐亞]그룹 양빈 회장이 신의주 경제특구 구상을 내놓았으나 중국의 신뢰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면서 양빈 회장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단둥시에 산업공단을 조성해놓고 있는 인천시 관계자는 양빈 장관의 기자회견이 있던 날 단둥시 고위관계자를 만난 결과를 전하면서 “중국 정부는 양빈 장관이 어떤 행보를 보이는지 지켜만 볼 뿐 결코 서두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의 이런 태도는 일단 양빈 장관이 중국 내 비즈니스를 통해 중국 정부의 신뢰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김연철 연구교수는 “중국 정부 입장에서 보면 너도나도 외자유치를 노리는 이 지역의 주도권이 신의주 쪽으로 쏠리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가 신의주 특구를 내심 반기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단둥시 관계자는 신의주 특구가 14%라는 최저 소득세를 제시한 데 대해 “투자 결정을 할 때는 비용 측면뿐 아니라 각종 인프라와 기본시설 등을 두루 고려해야 한다”는 말로 사실상 단둥과 신의주가 경쟁관계에 놓일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했다. 신의주 무비자 입국 실패 이후 양빈 장관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6개월 정도 걸릴 것’이라며 한걸음 물러서는 태도를 보인 것도 중국 정부의 이런 속내를 읽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주간동아’와 인터뷰한 장쩌민[江澤民] 주석의 한 측근도 “장주석 쪽에서 양빈 장관을 북한에 천거했다는 일부 외신보도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확인했다.
그렇다면 양빈 장관이 자신의 앞에 놓인 함정을 알고서도 과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그것이 양빈 장관이 네덜란드나 중국에서 벌여놓은 사업과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심지어 네덜란드촌이 제대로 분양되지 않을 경우 어우야그룹이 궁지에 몰리는 것은 물론 용도전환 과정에 관여한 중국 관료들에게도 불똥이 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양빈 장관이 무리수를 두고 있다고 분석하는 전문가도 있다. 중국 현지 관계자들은 네덜란드촌이 애초 화훼단지로 조성됐으나 대규모 주택단지로 용도변경하게 된 과정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또 네덜란드 유로아시아 그룹의 브로르 튜니스 이사는 네덜란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선양의 대규모 공사 과정에 랴오닝성[遙寧省]의 죄수들이 동원됐다는 사실을 인정해 양빈 장관의 ‘정경유착식’ 사업 모델의 일단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조명철 연구위원은 “양빈 장관이 초대형 네덜란드촌 분양에 어려움을 겪자 신의주 특구를 활용해 단둥-선양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수요를 유발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반면 김정일 위원장 입장에서는 양빈 장관이 다소 신뢰성이 없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경제특구 행정장관에 외국인을 임명했다는 것과 파격적 권한을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투자유치를 위한 과시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손해볼 것 없는 장사’라는 분석이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박정동 연구위원은 “양빈 장관 지명은 김정일 위원장 입장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카드였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양빈 장관이 북한 입장에서 볼 때 최선의 카드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단둥에서 만난 한 북한 소식통은 “김정일 위원장이 양빈 장관 외에도 몇몇 사업가에게 신의주 특구 개발을 맡기려고 했으나 대부분 고사하는 바람에 양빈이 선임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조명철 연구위원은 “결국 양빈 장관은 과도기적 인물에 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자칫 양빈 장관은 ‘일회용 카드’에 그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