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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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과 탐미 … 당당히 읽을 수 있는 ‘빨간 책’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4-11-01 14: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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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능과 탐미 … 당당히 읽을 수 있는 ‘빨간 책’
    ‘빨간 책’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로 읽힌다. 레드 콤플렉스의 산물인 불온서적 혹은 이념서적이거나 성적 자극을 주는 음란소설이나 도색잡지다. 두 ‘빨간 책’은 내용에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지만 한쪽은 머리를, 다른 한쪽은 아랫도리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또 남의 눈을 피해 숨겨놓고 읽었다는 점에서 한가지다.

    고인이 된 작가 이병주 선생은 이미 1970년대 엄혹한 유신 치하에서 “섹스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 당시 서울신문사가 발행한 ‘서울평론’에 56회 동안 동서양의 섹스문화를 집중적으로 다룬 ‘에로스문화사’를 연재했다. “철학자들이 섹스의 문제를 사고(思考)의 왕국에서 추방했대서 실사회의 성생활이 퇴색한 것도 시든 것도 아니다” “철학자들은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등한시했는데 그것은 호모 에로티쿠스(Homo eroticus·성애적 인간)라는 사실이다” 등 평소 그의 지론을 공개적으로 주장한 연재였다. 이 글들이 1987년 ‘에로스문화사-男과 女’라는 제목으로 첫 출간되었고 올해 다시 ‘이병주의 에로스문화탐사’(전 2권, 생각의나무 펴냄)로 세상에 나왔다. 연재를 시작한 지 거의 30년 만의 일. 이번에는 초판에서 볼 수 없었던 고대 동서양의 유물과 에로틱한 예술작품 등 240여점의 도판이 실려 있다. 솔직히 새로 나온 ‘이병주의 에로스문화탐사’는 화보집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현란한 도판과 꼼꼼한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600쪽에 달하는 두 권의 책이 아쉽기만 하다.

    그런 아쉬움을 달래줄 책이 릴케가 쓰고 로댕이 그린 ‘황홀의 순간’이다. 범부들에게는 단순한 성적 욕구도 릴케와 로댕이 만나면 관능과 탐미의 예술로 바뀐다. 로댕의 전기를 쓰기도 한 시인 릴케는 로댕이 인간의 육체를 조각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시작(詩作)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황홀의 순간’은 로댕의 소묘와 릴케의 시를 결합한 것이다. 릴케의 표현대로 “가만히 쉬고 있거나 꿈틀대는 육체의 가물대는 윤곽들”(로댕의 소묘)을 보며 시인은 어떻게 황홀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지 음미해 보자. 오랜만에 당당히 꺼내놓고 읽는 ‘빨간 책’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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