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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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도읍지의 맛, 전통의 향

  • < 허시명 · 여행칼럼니스트 storyf@yahoo.co.kr >

    입력2005-02-18 14: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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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년 도읍지의 맛, 전통의 향
    사람 많이 사는 서울에서 서울토박이를 찾아보기 어렵듯이, 서울 술을 찾기가 쉽지 않다. 서울 이름을 달고 나오는 술이라면 서울장수막걸리 정도일까. 궁궐도 있고 선비도 많았던 서울에 살아남은 술이 눈에 띄지 않다니! 백제 500년, 조선 500년 도읍지치고는 초라한 유산이다. 시류(時流)를 주도하는 자가 앞서 변하다보니, 제 모습을 가장 먼저 상실한 것일까.

    하지만 서울 술이 없는 게 아니다. 서울시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술이 네 종류가 있다. 약주 삼해주(권희자 기능보유), 소주 삼해주(이동복 기능보유), 송절주(이성자 기능보유), 향온주(정해중 기능보유)가 있다. 그러나 모두 기능만 보유하고 있지, 상업화하지는 못하고 있다. 한때 송절주가 시판되었지만 유통 기간이 짧은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1985년에 건설교통부로부터 민속주 지정을 받은 삼해주(나강형 기능보유)가 있는데, 현재는 새로운 주조장을 물색중이라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다.

    술 빚는 요령은 끊기지 않았다지만, 맛볼 술이 없으니 허전하기 한량없다. 그저 군침만 입에 괼 뿐인데, 건주정하듯 술 얘기를 할 수밖에 없겠다.

    500년 도읍지의 맛, 전통의 향
    서울 술이라함은 망설일 것 없이, 우선 궁중술들을 꼽을 수 있다. 나라 안에 좋은 술이란 술은 다 궁중으로 진상되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맛있는 술은 궁중에서 직접 빚었다. 고려시대에는 술을 전문으로 빚던 양온서라는 관청이 있었다. 그 궁중술이 다시 반가(班家)로 흘러나와 알게 모르게 빚어졌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현재 민속주 중에서 궁중에 뿌리를 두고 있는 술이 네 가지 있다. 경주 교동법주, 해남 진양주, 그리고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된 약주 삼해주와 향온주다. 경주 교동법주는 조선 숙종 때에 사옹원(궁궐의 음식을 주관하던 관청)의 참봉으로 있던 최국선씨가 낙향하면서부터 경주 최씨 문중에 전래되었다. 해남 진양주는 조선 헌종 때에 궁중술을 빚던 궁녀 최씨가 광산 김씨 집안에 시집오면서부터 전래된 술이다. 약주 삼해주는 조선 순조의 둘째딸인 복원 공주가 안동 김씨 집안에 시집오면서부터 전래되었다. 그 당시 삼해주는 서울과 경기 지방에서 널리 빚어졌기 때문에 궁중술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현재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 권희자씨의 술 빚는 법은 궁중 솜씨를 이어받고 있다 하겠다. 법주와 진양주와 삼해주가 13도에서 16도 사이의 약주인 반면, 향온주는 소주로서 유일하게 궁중술의 전통을 잇고 있다.



    향온주 기능보유자인 정해중씨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아파트에서 산다. 그는 매주 토요일이면 남산골 한옥마을에 나온다. 그곳의 오위장 김춘영 가옥의 대청마루에 상을 펴고, 향온주 재료와 술병을 올려놓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술 얘기를 해준다.

    정해중씨는 조상 대대로 전라도 광주에서 살아왔는데, 1979년에 서울로 이주했다. 정씨의 8대조는 좌찬성 벼슬을 한 정도시였다. 정도시는 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궁궐에 자주 드나들면서 상궁들로부터 향온주 빚는 요령을 귀담아 들었다. 그 뒤로 하동 정씨 집안에서 향온주를 빚게 되었다. 하동 정씨는 비록 광주의 객반(客班)이었지만, 대대로 향교의 유도회장을 끊이지 않고 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무시 못할 권세를 누렸다고 한다. 그래서 집에서 빚은 향온주를 광주 향교의 제례 때면 제주로 올리기도 했다.

    500년 도읍지의 맛, 전통의 향
    정해중씨의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목포에서 향온주를 빚었다. 그만큼 향온주를 잘 빚었고, 술에 대한 집착도 강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밀주를 빚었기에 두어해밖에 하지 못하고 다시 광주로 올라와야 했다.

    향온주가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서울로 이사온 정해중씨는 성균관의 시우회에 출입하며 시조창을 했다. 그의 실력은 “잘하든 못하든 남한테 빠지지는 안 헐” 정도인데, 어느 날 술 얘기가 나왔다. 그때가 88올림픽이 있던 가을이었다. 그 자리에 성균관 관장인 박중훈씨도 있었는데, 정씨는 “성균관이나 종묘에서 제사를 할 때믄 우리 술이 있는디 왜 시중에 있는 술로 제주를 쓰는지 모르겄습니다”고 말했다. 그러자 관장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정씨는 향온주 내력을 말했다. 그러자 관장이 정씨의 손을 꼬옥 잡으면서 그런 귀한 술이 있는데도 몰랐다며, 감격해했다. 관장인 박중훈씨는 곧바로 추천서를 써줄 테니까 서울시에 가서 바로 문화재 신청을 하라고 했다. 정씨는 나이도 많은데 지금 어떻게 시작하냐며 마다했다. 그런데 관장은 만날 때마다 인감도장을 주면서 추천서를 써줄 테니까 자꾸 하라고 떠밀었다. 정씨는 더는 거스를 수 없어서, 서울 시청 문화재과에 신청서를 냈다. 이렇게 해서 향온주는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향온주는 누룩을 빚을 때에 그냥 물이 아닌 녹두물로 밀기울을 반죽하는 게 독특한 점이다. 옛 어른들은 약을 먹을 때에 약효가 줄어든다고 녹두죽을 먹지 못하게 했다. 거꾸로 약에 중독되면 녹두죽을 먹였다. 녹두가 해독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향온주의 누룩에 들어가는 녹두는 주독을 없애기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향온주 재료는 누룩과 찹쌀과 멥쌀이다. 세 가지가 비슷한 양으로 들어간다. 밑술을 담근 지 5일이 지나면 발효가 이뤄진다, 그러면 재차 누룩과 찹쌀과 멥쌀을 같은 비율로 넣는다. 이렇게 5일 간격으로 덧술 치기를 다섯 번까지 할 수 있다. 여러 번 덧술을 할수록 술은 진해지고 향은 강렬해진다. 한 달쯤 걸려 전술(증류 전단계의 술)을 만든 뒤, 이를 소주고리로 증류하여 40도 술을 만든다. 술은 한 달 이상 지하에 숙성시킨 뒤 마셔야 향이 좋고 부드럽다. 향온주라는 뜻이, 향기 나고 따뜻한 술인 만큼 진한 향이 기대되는 술이다.

    술 이야기밖에 할 수 없음이 아쉽다. 토요일에 남산골 한옥마을로 가면 그 술 얘기나마 정해중씨로부터 들을 수 있다. 술은 오는 4월25일부터 1주일간 남산골에서 서울시 무형문화재 시연회가 있을 예정이니, 그때라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아, 그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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