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보’는 할리우드의 전설로 남아 있는 작가 돌턴 트럼보 전기 영화다. 미국 민주주의에 큰 오점을 남긴 매카시즘이 비판의 대상이 될 때면, 트럼보의 이름은 어김없이 소환된다. 알다시피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반(反)미국활동’이라는 모호한 잣대로 진보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6·25전쟁 때는 매카시 의원이 주도하는 ‘반미국활동위원회’의 과도한 ‘활동’ 때문에 정부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은 모두 위험시되는 정신적 독재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이런 비이성적인 일이 지구촌 어느 변방의 독재정부 아래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상징’인 미국에서 벌어졌다. 이때 시나리오 작가 트럼보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의회에 소환된다. 그는 위원회 신문 자체가 위헌이라며 의원들의 질문에 묵비권을 행사했고, 의회모독죄로 1년간 수감된다.
영화 ‘트럼보’는 작가의 이 수난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거의 10년 동안 공식적으로는 작가활동을 하지 못했다. ‘매카시즘의 유령’ 때문이다. 애국심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던 매카시즘은 법적 강제력까지 갖추고 사람들의 정신과 행동을 옥죄기 시작했다. 보통 영화인들은 귀찮아서, 살기에 급급해서, 혹은 무서워서 매카시즘과 싸우는 일에 나서길 꺼려했다. 어딘가에 ‘찍히기’ 싫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사이 매카시즘은 공룡처럼 몸통을 불려갔다. ‘찍힌’ 트럼보는 할리우드에서 쫓겨났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필명으로 저예산 싸구려 영화 대본을 말 그대로 ‘써재끼곤’ 했다. 그런 와중에도 동료 작가의 이름을 빌려 쓴 ‘로마의 휴일’(1953)과 필명으로 쓴 ‘브레이브 원’(1956)으로 두 번에 걸쳐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말하자면 어떤 탄압도 트럼보의 예술적 재능을 막을 수 없었고, 매카시즘의 위기를 이겨낸 트럼보는 미국 민주주의의 양심으로 남았다. 이 정도면 ‘영웅 내러티브’를 특히 좋아하는 할리우드로서는 놓칠 수 없는 인물이고, 영화 ‘트럼보’는 그 결과물이다.
그런데 한 가지 찜찜한 사실이 남는다. ‘트럼보’는 한 천재작가의 ‘특별한’ 용기를 강조한 나머지, 그를 나락에 빠뜨린 정치적 마녀사냥의 부끄러운 역사에 대해서는 표피적으로 지나치고 만다. 당시의 정치적 무모함에 대한 성찰이 너무 적어 부끄러운 과거를 의도적으로 숨기려 한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든다. 만약 트럼보를 공격하던 매카시즘의 ‘애국심’을 묘사했다면, 그건 지금 세를 얻고 있는 일부 보수주의자의 의견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도널드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의 의견 말이다. ‘트럼보’는 무엇이 두려운지 혹은 무엇을 노리는지, 시장의 다수 관객이 불편해할 과거 수치를 성찰하는 데는 매섭지 못하고, 한 개인을 영웅으로 만드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매카시즘의 유령이 출몰하는 듯한 의문이 드는 것이다.
‘트럼보’를 만든 제이 로치 감독은 원래 ‘오스틴 파워 시리즈’ 같은 시장친화적인 코미디를 만들며 명성을 얻었다. 매카시즘을 이겨낸 영웅을 그린 영화가 역설적이게도 매카시즘의 유령을 너무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