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가운데 하나가 점심시간 후 낮잠을 가리키는 시에스타(siesta)다. 스페인에선 태양이 이글거리는 한낮에 한두 시간 정도 잠을 자는 오랜 관습이 지금까지 유지됐고, 이 때문에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기업과 상점 대부분이 문을 닫는다. 스페인 재계는 시에스타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국내총생산(GDP)의 8%나 된다면서 이 관습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 때문에 공무원의 시에스타는 공식적으로 폐지됐지만, 민간 부문에서는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
2016년 봄 스페인 정치권의 상황은 말 그대로 시에스타다. 2015년 12월 20일 총선이 실시됐지만 아직까지 정부조차 구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 당시 총선에서는 1975년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국민당과 사회당 양당체제가 무너지고 신생 정당인 포데모스와 시우다다노스가 약진하는 이변이 연출됐다. 하원 전체 의석(350석) 가운데 중도우파인 국민당이 123석, 중도좌파인 사회당이 90석, 급진좌파인 포데모스가 69석, 중도우파인 시우다다노스가 40석을 차지했다.
내전(1936~39) 이후 36년간 독재체제가 유지돼온 스페인은 1975년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 사망하고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국민당과 사회당이 정권을 주고받아왔다. 지난해 총선에서 양당체제가 붕괴되고 4당 체제가 된 것은 일종의 혁명이나 다름없는 상황. 그러나 법정 정부 구성 시한인 5월 2일까지 어느 정당도 대연정은 물론 소수 연정도 구성하지 못했고, 결국 펠리페 6세 국왕은 6월 26일 재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내각책임제인 스페인에서 정부 구성에 실패해 총선을 다시 치르는 것은 처음이다.
국민당이 연정 구성에 실패하자 펠리페 6세는 2월 권한을 산체스 대표에게 넘겼다. 산체스 대표는 사회당, 시우다다노스와는 연정 구성에 합의했지만 포데모스를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포데모스가 표면적으로 내건 거부 이유는 노선이 다른 시우다다노스가 들어간 연정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속내는 다르다. 포데모스가 같은 좌파 계열인 사회당과 연정 구성에 합의하지 않는 근본 이유는 사회당이 기득권 세력을 대변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존 정치체제를 부정하고 새 질서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포데모스는 스페인어로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2008년 대통령선거 구호에서 따왔다. 2011년 5월 15일 수도 마드리드에서 긴축 조치와 빈부격차에 항의해 시작된 ‘분노하라(Indignados) 시위’가 그 뿌리다. 시위에 참가했던 지도자들이 뭉쳐 2014년 1월 창당했기 때문이다.
포데모스는 창당 4개월 만에 치른 유럽의회 선거에서 8%를 득표해 5석을 확보하며 스페인 정치권을 깜짝 놀라게 했고, 2015년 5월 24일 실시한 지방선거에서도 당시 집권 여당인 국민당과 제1야당인 사회당을 제치고 주요 도시 의회를 장악했다. 2008년 유럽 재정위기 이후 긴축정책으로 고통을 겪어온 국민의 불만이 표로 분출된 결과였다.
포데모스를 이끄는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대표는 38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 지도자다. 트레이드마크인 뒤로 질끈 묶은 말총머리와 턱수염은 양복과 단정한 짧은 머리로 대표되는 스페인 주류 정치권 ‘라 카스타(엘리트)’에 도전하겠다는 반항의 상징이다. 이글레시아스 대표는 이윤을 내는 기업의 노동자 해고 금지, 최저임금 인상, 부유세 신설, 법인세 인상, 병원과 교육 부문의 국유화 등을 주장해왔다.
포데모스는 당 재정의 절반은 대중모금으로, 나머지는 정기후원으로 해결하고 있다. 모든 선거에 나서는 후보자는 ‘아고라 보팅(Agora Voting)’이라는 온라인 플랫폼을 사용해 당원이 직접 뽑는다. 당원은 대부분 20, 30대 젊은 층. 스페인 실업률은 22.1%에 달하지만 젊은 층의 실업률은 그 2배가 넘는 48.4%나 된다. 포데모스는 사회당과의 연정에 대해 당원 투표를 실시한 결과 88.2%가 반대표를 던졌다고 밝혔다.
시우다다노스는 스페인어로 ‘시민들’이란 뜻으로, 2006년 카탈루냐 분리 독립을 추진하는 좌파 민족주의에 맞서고자 우파가 결집해 만든 정당이다. 법인세 감면을 주장하는 친기업적 정당으로, 리더인 알베르트 리베라도 36세의 젊은 정치인이다. 리베라 대표는 기성 정치권의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우며 시우다다노스를 단숨에 중앙정치권에 입성케 했다. 수영선수 출신으로 변호사 일을 하다 정치에 뛰어든 그는 과거 지방선거에서 ‘청렴’을 강조하려고 자신의 나체 사진을 포스터에 쓰기도 했다. 집권 국민당의 부패에 실망한 우파 유권자 상당수는 지난 총선에서 시우다다노스에게 표를 몰아줬다.
스페인에서 2차 총선이 실시되면 과연 연정이 출범할 수 있을까. 최근 여론조사만 놓고 보면 4당의 의석수가 크게 변하지 않으리란 예측이 지배적이다. 경제상황이 호전된 덕에 국민당이 약간의 우세를 보이고 포데모스의 기세가 다소 꺾일 것이라는 전망이 있지만, 어느 당도 과반수를 차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더욱이 4당이 연정 구성에 합의할 가능성도 낮다. 어떤 조합으로라도 연정 구성에 실패한다면 스페인의 무정부 상태는 상당 기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연정 구성 협상에 처음 임해본 4당이 저마다 자신들의 공약을 양보할 수 없다며 타협하지 않고 있기 때문. 자칫하면 3차, 4차 총선이 실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타협의 노하우가 없는 스페인 정치권이 빠진 함정이다.
2016년 봄 스페인 정치권의 상황은 말 그대로 시에스타다. 2015년 12월 20일 총선이 실시됐지만 아직까지 정부조차 구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 당시 총선에서는 1975년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국민당과 사회당 양당체제가 무너지고 신생 정당인 포데모스와 시우다다노스가 약진하는 이변이 연출됐다. 하원 전체 의석(350석) 가운데 중도우파인 국민당이 123석, 중도좌파인 사회당이 90석, 급진좌파인 포데모스가 69석, 중도우파인 시우다다노스가 40석을 차지했다.
내전(1936~39) 이후 36년간 독재체제가 유지돼온 스페인은 1975년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 사망하고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국민당과 사회당이 정권을 주고받아왔다. 지난해 총선에서 양당체제가 붕괴되고 4당 체제가 된 것은 일종의 혁명이나 다름없는 상황. 그러나 법정 정부 구성 시한인 5월 2일까지 어느 정당도 대연정은 물론 소수 연정도 구성하지 못했고, 결국 펠리페 6세 국왕은 6월 26일 재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내각책임제인 스페인에서 정부 구성에 실패해 총선을 다시 치르는 것은 처음이다.
‘분노하라’ 시위가 만들어낸 정당
펠리페 6세는 총선 직후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 대행이 이끄는 국민당에 연정 구성 권한을 줬다. 라호이 총리 대행은 제2당인 사회당의 페드로 산체스 대표에게 대연정을 제의했지만 두 당은 흡사 물과 기름처럼 전혀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집권 여당이던 국민당 정부는 2012년 스페인이 구제 금융을 받게 되자 4년간 고강도 긴축정책 등 강력한 경제개혁 조치를 추진해온 반면, 사회당은 이에 반대하며 사사건건 국민당과 충돌했다. 그간 권력을 독점해온 두 정당이 대연정을 통해 권력을 분점하는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국민당이 연정 구성에 실패하자 펠리페 6세는 2월 권한을 산체스 대표에게 넘겼다. 산체스 대표는 사회당, 시우다다노스와는 연정 구성에 합의했지만 포데모스를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포데모스가 표면적으로 내건 거부 이유는 노선이 다른 시우다다노스가 들어간 연정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속내는 다르다. 포데모스가 같은 좌파 계열인 사회당과 연정 구성에 합의하지 않는 근본 이유는 사회당이 기득권 세력을 대변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존 정치체제를 부정하고 새 질서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포데모스는 스페인어로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2008년 대통령선거 구호에서 따왔다. 2011년 5월 15일 수도 마드리드에서 긴축 조치와 빈부격차에 항의해 시작된 ‘분노하라(Indignados) 시위’가 그 뿌리다. 시위에 참가했던 지도자들이 뭉쳐 2014년 1월 창당했기 때문이다.
포데모스는 창당 4개월 만에 치른 유럽의회 선거에서 8%를 득표해 5석을 확보하며 스페인 정치권을 깜짝 놀라게 했고, 2015년 5월 24일 실시한 지방선거에서도 당시 집권 여당인 국민당과 제1야당인 사회당을 제치고 주요 도시 의회를 장악했다. 2008년 유럽 재정위기 이후 긴축정책으로 고통을 겪어온 국민의 불만이 표로 분출된 결과였다.
포데모스를 이끄는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대표는 38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 지도자다. 트레이드마크인 뒤로 질끈 묶은 말총머리와 턱수염은 양복과 단정한 짧은 머리로 대표되는 스페인 주류 정치권 ‘라 카스타(엘리트)’에 도전하겠다는 반항의 상징이다. 이글레시아스 대표는 이윤을 내는 기업의 노동자 해고 금지, 최저임금 인상, 부유세 신설, 법인세 인상, 병원과 교육 부문의 국유화 등을 주장해왔다.
연정 구성, 앞으로도 어려울 듯
1978년 역사학과 교수인 아버지와 스페인 노동조합연맹 변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이름부터 부모가 19세기 ‘스페인 사회주의의 아버지’인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지어준 것이다. 중학생 시절(14세)부터 스페인 공산당에서 청년당원으로 활동하며 반(反)세계화 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등 급진좌파 정치인의 한길을 걸어왔다. 마드리드 콤플루텐세대 정치학과 교수 출신인 그는 반부패와 긴축 반대를 내세워 지지 기반을 넓혔다.포데모스는 당 재정의 절반은 대중모금으로, 나머지는 정기후원으로 해결하고 있다. 모든 선거에 나서는 후보자는 ‘아고라 보팅(Agora Voting)’이라는 온라인 플랫폼을 사용해 당원이 직접 뽑는다. 당원은 대부분 20, 30대 젊은 층. 스페인 실업률은 22.1%에 달하지만 젊은 층의 실업률은 그 2배가 넘는 48.4%나 된다. 포데모스는 사회당과의 연정에 대해 당원 투표를 실시한 결과 88.2%가 반대표를 던졌다고 밝혔다.
시우다다노스는 스페인어로 ‘시민들’이란 뜻으로, 2006년 카탈루냐 분리 독립을 추진하는 좌파 민족주의에 맞서고자 우파가 결집해 만든 정당이다. 법인세 감면을 주장하는 친기업적 정당으로, 리더인 알베르트 리베라도 36세의 젊은 정치인이다. 리베라 대표는 기성 정치권의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우며 시우다다노스를 단숨에 중앙정치권에 입성케 했다. 수영선수 출신으로 변호사 일을 하다 정치에 뛰어든 그는 과거 지방선거에서 ‘청렴’을 강조하려고 자신의 나체 사진을 포스터에 쓰기도 했다. 집권 국민당의 부패에 실망한 우파 유권자 상당수는 지난 총선에서 시우다다노스에게 표를 몰아줬다.
스페인에서 2차 총선이 실시되면 과연 연정이 출범할 수 있을까. 최근 여론조사만 놓고 보면 4당의 의석수가 크게 변하지 않으리란 예측이 지배적이다. 경제상황이 호전된 덕에 국민당이 약간의 우세를 보이고 포데모스의 기세가 다소 꺾일 것이라는 전망이 있지만, 어느 당도 과반수를 차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더욱이 4당이 연정 구성에 합의할 가능성도 낮다. 어떤 조합으로라도 연정 구성에 실패한다면 스페인의 무정부 상태는 상당 기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연정 구성 협상에 처음 임해본 4당이 저마다 자신들의 공약을 양보할 수 없다며 타협하지 않고 있기 때문. 자칫하면 3차, 4차 총선이 실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타협의 노하우가 없는 스페인 정치권이 빠진 함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