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롱게이트를 통과해 BP, 쉘, 칼텍스 등 메이저 정유사들의 공장을 지나면 소금기를 머금은 간척지가 눈에 들어온다. 콘크리트 말뚝으로 지반 안정 공사를 하고 있는 곳을 지나 다시 얼마간 비포장도로를 달리면 ‘SK’라는 낯익은 로고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SK㈜의 대규모 석유제품 물류기지 건설 현장.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의 정유회사가 중국, 싱가포르를 거쳐 중동까지 이어지는 오일벨트 구축에 나선 것이다.
2005년 세계적 에너지정보회사 ‘플릿츠’는 SK㈜가 세계 250대 에너지 기업 중 34위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2004년 125위에서 무려 91계단을 껑충 뛰어올라 동북아 대표 에너지 기업 중 하나로 도약한 것. 특히 주당 이익 부문에서 11.50달러로 10위, 석유 정제·영업·저장·수송 부문에서는 4위에 랭크되는 기염을 토했다.
2005년 250대 에너지 기업 중 34위
SK㈜의 뿌리는 대한석유공사다. 1962년 우리 정부와 미국 석유회사 ‘걸프’가 합작해 만든 회사. 64년 울산 정유공장이 가동을 시작했고, 72년 울산-대구 간 장거리 송유관 부설공사를 완료했다. 73년에는 나프타분해센터 정상가동과 함께 종합석유·석유화학제품 생산 및 판매업체로서의 면모도 갖췄다. 80년 선경(현 SK네트웍스)이 ‘걸프’ 소유 주식 50% 및 경영권을 인수함에 따라 오늘의 SK㈜가 탄생했다.

예멘 마리브 유전.
10년 전만 해도 725억원에 불과하던 SK㈜의 순이익이 2조원대를 넘어선 데에는 적기 투자와 내수시장의 한계를 극복한 글로벌 전략이 주효했다.
적기 투자와 관련한 가장 최근의 사례는 2005년 3조원이란 거금을 들여 인천정유를 인수한 것이다. 중국 시장 공략을 위해서는 새 설비투자가 필요했고, 생산 한계에 봉착한 울산콤플렉스만 바라보기보다 과감한 투자로 새 돌파구를 찾은 것. 인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SK㈜ 경영진은 서울 서린동 본사 사옥을 매각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이를 통해 SK㈜는 아·태 지역 메이저 플레이어로의 도약을 위한 기반을 확립하게 됐다.
해외 유전 4억 배럴 에너지 매장량 보유
2000년 2월16일 결정된 페루 카미시아 유·가스전 광구 입찰 또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SK㈜는 미국 ‘헌트오일’, 아르헨티나 ‘플루스페트롤’ 등 5개사와 컨소시엄을 이뤄 국제 경쟁입찰에 참여했다. 이미 메이저사인 ‘쉘’과의 지리한 협상을 경험한 페루 정부는 최대 35%까지 로열티를 요구했다. 입찰 이틀 전 SK㈜ 컨소시움은 예상을 깨고 가이드라인보다 높은 로열티를 제시했다. 임시종 SK㈜ 페루 지사장은 “경제성 분석 결과 40%까지도 로열티를 줄 수 있다는 데 컨소시엄 대표들이 동의했고, ‘헌트’ 대표의 생일인 7월24일에 맞춰 37.24%로 결정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결과는 당연히 SK㈜ 컨소시엄의 승리. ‘겨우’ 35.5%의 로열티 비율을 제시하고 의기양양해하던 프랑스 ‘토탈’사의 미소는 SK㈜ 컨소시엄의 제시 비율이 공개되자 곧 참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석유개발사업은 흔히 클럽(Club) 비즈니스라 불린다. 기세등등한 오일 메이저들은 그들끼리만 양질의 정보를 공유하며 물밑거래를 통해 광구 입찰을 따내곤 한다. 그런 만큼 페루에서의 ‘승리’나 98년 9월 석유공사와 SK㈜가 힘 합쳐 베트남 15-1 광구 개발권을 따낸 것은 값진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현재 SK㈜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해외 자원개발 현장은 미국 루이지애나 북이베리아 광구다. 단순 지분 참여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석유개발 기술력 보유 회사로서 실력을 인정받는 발판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일련의 노력을 통해 SK㈜는 2005년 말 현재 약 4억 배럴의 에너지 매장량을 보유하게 됐다. 국내 연간 원유 소비물량(약 7억 배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규모다. 하루 평균 생산량만 해도 2만7000배럴. SK㈜는 이를 2007년에는 하루 6만 배럴, 2010년에는 10만 배럴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천연가스 개발에서도 성과를 보고 있다. 30% 지분 참여를 한 페루LNG가 2009년부터 연간 420만t의 LNG를 미국·멕시코에 공급키로 한 데 이어, 2008년부터 20년간 우리나라에 천연가스를 공급하게 될 예멘LNG 개발 작업에도 본격 착수했다. 이렇듯 선대 최종현 회장으로부터 현 최태원 회장에게로 이어진 무자원 산유국의 꿈은 이제 ‘해가 지지 않는 유전개발’로 그 결실을 거두고 있다.

SK㈜가 ‘기름’이나 ‘가스’만 파는 것은 아니다. 중국 상하이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푸둥(浦東) 외곽 4차선 도로. 아스팔트 재포장 공사가 한창이다. 총 왕복 340km에 달하는 거리를 덮을 아스팔트는 SK㈜의 제품이다.
도로공사를 책임지고 있는 뤄쥔셴(羅俊賢·43) 씨에게 SK㈜ 아스팔트의 ‘성능’을 물었다. 뤄쥔셴 씨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중국의 기후조건까지 고려한 데 만족한다. 외국 기업임에도 주문부터 공급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물류 시스템도 놀랍다”고 말했다. 저장성(浙江省) 항조우(杭州) 인근 진화(金華)에선 아스팔트 공장이 시험가동 중이다. 연간 20만t의 고급 아스팔트를 생산하는 이 공장은 SK㈜ 중국 현지화 전략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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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16일 인천정유 인수 계약을 체결한 최태원 SK㈜ 회장(왼쪽에서 세 번째)과 인천정유 김재옥 법정관리인(오른쪽에서 두 번째).

페루 카미시아 유·가스전.
SK㈜는 중국 사업을 해외 사업으로 보지 않는다. 비즈니스에서 이미 중국과의 사이에 국경은 의미가 없다는 것. 2010년 중국 땅에 제2의 SK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구사하며 승부수를 띄우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한한 성장 잠재력을 가진 중국이야말로 제2의 기지”라며 “중국을 디딤돌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에너지·화학 메이저 회사로 거듭날 것”이란 각오를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