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5일 오후 7시쯤 한 은행 본점 풍경. 업무시간에 끝났지만 대부분의 직원이 남아 일하고 있다.
김씨가 지점장이 된 것은 2000년. 격변의 5년 사이 숱한 선후배 동료들이 은행을 떠났다. 김 지점장은 이제 ‘돈을 벌어오라’는 회사의 지시가, ‘누가 발로 뛰는지 본점에서는 다 알고 있다’는 선배들의 충고가 헛말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요즘 대출 모집을 위해 중소기업 사장들을 만나고, 직접 접대도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소기업 사장들은 은행 지점장 만나는 게 하늘의 별따기였어요. 사무실에 찾아와 굽실굽실하면 한 번씩 만나주곤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죠. 지점장에게 ‘대출 심사 전결권’이 있었으니까 실질적인 힘도 있었고요. 그렇지만 이제는 지점장 끈 떨어진 거 다 알지 않습니까. 요새는 공단 쪽에 가면 작은 공장 사장들도 바쁘다며 튕긴다니까요. 정말 격세지감이에요.”
이메일로 퇴직대상 통보 … “이메일 열기 겁나요”
김씨처럼 40대 후반, 50대 초반 지점장들에게는 은행원을 대하는 사회의 인식 변화가 피부로 느껴진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기 전까지만 해도 은행원은 명문 대학 나와서 깨끗한 일을 하며 정년까지 보장받는, 남부러울 것 없는 엘리트이자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게다가 지점장이라고 하면 기사 딸린 전용 승용차에 수십명이 넘는 부하직원, 주변 기업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대출 심사 전결권, 직원 인사권과 넉넉한 업무 추진비를 가진, 안정적인 중산층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지점장에게 업무용 승용차는 나오지만 기사는 없다. 여러 차례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부하 직원은 절반 이하로 줄었고, 일은 배가 넘게 껑충 뛰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억원에 이르던 대출 심사 전결권은 아예 없어져버렸다. 은행들이 대출 결제 권한을 본점에 집중시키면서, 지점에서 고객의 연봉·담보 등을 입력하면 온라인으로 대출 가능 금액과 금리가 자동으로 계산돼 나오는 시스템이 마련된 것이다. 지점장이 대출 금액을 더 주고 말고 할 권한이 아예 없어진 마당에, 그 앞에서 ‘꼼짝 못하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다. 대출 권한을 무기로 막대한 예금을 끌어들이며 지점의 실적을 올리던 지점장들은 이제 ‘대출 세일즈맨’이 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어느 회사나 업무 스트레스는 다 있다고들 하죠. 하지만 온실 안에서 자라다 갑자기 황야로 내몰린 사람이 느끼는 위기감은 말로 다 못해요. 게다가 지점장은 ‘실적’ ‘성과’가 연봉이나 근무 연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니까 그 스트레스라는 게…. 참, 말로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지점장 발령 난 뒤부터 은행에 개인 짐을 두지 않습니다. 언제 나가게 될지 모르니까, 떠나야 할 때 깨끗이 털고 일어나기 위한 나름의 준비죠.”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은행원들은 상시적 구조조정과 실적 제일주의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고객들로 붐비는 서울 시내 한 은행 풍경.
더 큰 스트레스는 상시적 구조조정이다. 김 지점장은 은행 내에서 승승장구하던 선배 지점장이 나이 제한에 걸려 어이없이 사표 쓰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다. 지난해 옷을 벗은 그는 김 지점장보다 겨우 세 살 위였다.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아들이 마음에 걸려 어떻게든 버티려고 애쓰다 임원들과의 면담 끝에 결국 사표를 쓴 그는 지금 사실상 ‘놀고 있다’.
“구조조정의 이유도, 시기도 정해진 게 없어요. 경영진의 판단이죠. 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불안합니까. 어느 날 갑자기 이메일이 오는 겁니다. 희망퇴직 대상자에 포함됐다는 거죠. 일정 안에 신청 안 하고 버티면 임원이 불러요. 후배들을 위해 용퇴하라고 하다가, 그래도 남겠다고 하면 인사고과까지 들먹이며 인격적 모멸감을 준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걸 피해 휴가를 내고 도망다니다 결국은 ‘잘려 나간’ 사람도 압니다. 그렇게 불려가 사표를 쓰고 내려오는 사람을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얼마나 민망한지 압니까. 그냥 다른 데를 보거나, 어색하게 목례하고 돌아서야 해요.”
그렇게 한 번 광풍이 불고 나면, 회사 분위기는 엉망이 된다. 구조조정 초기에는 회사를 떠나는 선배들과 술자리라도 갖는 ‘정’이 남아 있었지만, 요즘에는 인사 정도로 끝낸다. 다른 사람의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당장 자신의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김 지점장은 “사람은 줄었는데 방카슈랑스다 모바일 뱅킹이다, 지점이 챙겨야 할 일이 크게 늘었어요. 게다가 요즘은 부하의 실수 하나가 지점장의 진퇴를 결정짓는 세상이거든요. 나중에 어떻게든 버티려는 제게 회사가 ‘전에 당신 지점에서 이런 사고가 났다. 이제라도 책임지고 옷 벗어라’ 할 수 있어요. 신경 쓸 게 많으니 이제는 회사 사람들끼리도 마음 편히 술 마실 여유가 없습니다”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시작된 보험(방카슈랑스 상품), 휴대전화(모바일 뱅킹용 단말기) 판매가 지점장들에게 주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할당된 목표를 채우지 못할 경우 예금 대출 업무 부진의 경우처럼 무능한 지점장으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결국 부하 직원들을 닦달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지점 분위기가 냉랭해지기 일쑤다. 최근에는 노조 차원에서 지점장들이 목표 달성에 대한 강박 관념으로 직원들을 몰아붙인다며 항의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은행이 새로운 상품을 취급할 때마다 개인별 실적 할당을 내림으로써 부담을 이기지 못한 직원들이 자기 주머니를 털게 만들고 있다는 항의다.
동료들과도 실제 경쟁 … ‘정’ 넘친 분위기 점차 사라져
‘그럼 지점장은 부담이 없나’ 발끈하지만 지점장에게는 함께 이야기를 나눌 동료도 없다. 실적 경쟁의 전장에 팽개쳐진 동기들은 어느새 ‘경쟁자’이자 ‘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쪼는’ 회사와 ‘치받는’ 부하들 사이에서 지점장은 홀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내 회사라는 의식이 강했어요. 동료들끼리도 한 길을 가는 ‘동반자 의식’ 같은 게 있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낱낱이 개인입니다. 금융 상품을 팔러 다니는 마케팅의 선봉이 되어, 어떻게든 최대한 길게 버티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아끼는 후배들에게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쓸모없어지는 순간 버려지는 것, 그것을 빨리 알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요. 저요? 저야 이미 다 끝난 걸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