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5일 통일부 장관실에서 회담을 하고 있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오른쪽)과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
‘있지도 않은 공화국(북한)의 핵 문제를 거론할 것이 아니라 남한의 핵 문제부터 해결하라’던 북한의 공세는 IAEA의 ‘면죄부’로 근거를 상실한다. 그리고 북한은 6자회담 재개 요구를 수용,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4차 6자회담 본회의에 참석한다.
회담은 ‘동결 대 보상’을 주장하는 북한과 ‘리비아식 핵 포기’를 요구하는 미국 의견이 평행선을 그리며 난항을 거듭한다. 그러나 먼저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포기할 경우 그에 대한 보상으로 북미평화협정 체결 및 대북 경제지원을 제공하겠다는 미국의 약속을 한-일-중-러가 ‘보증’하겠다는 조건이 받아들여지면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국면이 펼쳐진다.
이로써 1992년 이후 한반도를 긴장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던 북한 핵 문제가 타결되고, 북한은 ‘불량국가’란 꼬리표를 떼어낸다.”
재선에 성공,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한반도 정책이 순조롭게 풀려나갔을 경우를 상정한 최상의 시나리오다.
물론 정반대의 시나리오도 가정해볼 수 있다. 한국의 핵물질 실험을 ‘중대한 안전조치협정 위반’이라고 판단한 IAEA가 이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고, 북한은 고농축우라늄(HEU) 존재를 부인한다. 그리고 6자회담 거부, 북한 핵 문제 안보리 상정, 북한의 핵무기 보유선언 등의 과정을 거치며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이다. 6자회담이 재개되더라도 북한과 미국이 뚜렷하게 의견 차이를 보여 북핵 문제가 장기화될 수도 있다.
어떤 형태로든 진지한 노력 전망
북핵 위기와 북미관계에 대한 다양한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지난 4년간 강공 일변도로 나서온 부시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급격하게 변화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테러와의 전쟁’ 수행과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 비확산이라는 정책 목표는 제2기 부시 행정부가 고수하게 될 불변의 정책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북한은 미국이 추구하는 최고의 정책 목표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다. 또한 핵 모호성을 통한 협상력 증대 및 핵 억지력 확보를 국가 존립의 핵심 요인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북한 핵 문제가 해결 가능하다고 보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지난 4년간 미국이 북한 핵에 대해 취해온 정책은 북한 핵 문제의 적극적 해결 노력이라기보다,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을 통해 북핵 문제가 악화되지 않도록 ‘관리’해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이는 미국이 이라크전쟁과 테러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던 탓이다.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은 이 같은 미국의 태도를 “대화는 하되, 협상은 하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북한 핵 문제가 우선 처리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에 미국은 어떤 형태로든 북한 핵 문제 해결에 진지한 노력을 다할 것으로 전망된다.
협상 태도에서도 미국이 조금은 ‘유연한 힘의 외교’를 펼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전망된다. ‘힘의 외교’ 기조가 유지되겠지만 부시 정부는 국제 사회에서의 ‘독불장군’이라는 이미지 불식, 그리고 미국의 지도력 회복 등을 위해 좀더 부드러운 태도로 국제무대에서의 협상에 임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6자 회담장에서도 ‘새로운’ 얼굴을 보여줄 가능성이 있다. 문정인 동북아시대 위원장은 “미국은 3차 6자회담에서 보상 문제를 언급하며 변화된 태도를 내놓았다. 이제야 겨우 실질적인 협상이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결과를 기대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의 협상 의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북한의 태도다. 2002년 10월 이후 북한은 조금씩 핵 위협 수위를 높여왔지만, 부시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은 무시에 가까운 반응을 보여왔다. 고유환 교수(동국대 북한학과)는 “이 같은 미국의 반응은 이제 더 이상 북한의 핵 위협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북한의 핵 능력 과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미 북한의 핵 능력을 파악하고 있다는 뜻으로도 보인다”고 분석했다.
남·북 대화 활성화 분위기 팽배
고교수는 또 “미국이 북한에 체제 안전보장과 핵 개발 포기에 따른 반대급부로의 보상이라는 핵 포기 명분을 주는 것이 필요하지만, 핵 개발 의지의 포기는 불가항력”이라고 말했다. 결국 부시 행정부의 다소 온건해진 대북 협상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거스를 수 없는 핵폐기(CVID)’라는 대북 핵 처리 원칙에는 변화가 없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북한이 ‘전략적 결단’을 내려주는 게 문제 해결의 열쇠라는 지적이다.
북한이 전략적 결단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 있는 구실은 한국과 중국의 몫으로 보인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이자 항미원조의 형제국, 파국으로 치닫는 북한 경제를 지탱해주는 원조자로서의 중국이 북한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2차 핵 위기 이후 단절된 북미 간의 대화를 재개시킨 베이징에서의 북-미-중 3자회담에서 보여주었듯이 중국은 북한을 움직여 전략적 결단을 이끌어낼 수 있다.
한국도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본격화된 남북교류협력 등을 통해 북한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생겼다. 하지만 통일부와 외교통상부 사이에 부시 대통령의 재선에 따른 북한 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방법론에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통일부가 6자회담과는 별도로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중단된 남·북 간의 관계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외교부는 6자회담의 틀 속에서 순리에 따른 해결을 해야 한다는 태도다.
물론 통일부의 공식적인 태도는 “현 단계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만, 10월26일 이봉조 통일부 차관은 “11, 12월에 논의하고 내년 1, 2월에 준비해 3월에 의미 있는 일을 이뤄야 한다”고 발언해 정상회담 추진을 시사했다. 이에 앞서 10월4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도 “6·15 공동선언 5년째가 되는 2005년에는 정상회담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같은 발언들을 종합해볼 때 통일부 내부에서는 2기 부시 행정부 출범 이전에 남·북 대화를 활성화해 한반도 평화의 ‘이니셔티브’를 한국이 쥐자는 움직임이 실존하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반면 외교부는 6자회담이라는 기존 합의의 틀 내에서 미국과 북한이 타협점을 찾는 데 한국 정부가 기여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현시점에서의 최적의 정책 선택이라는 태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기문 외교부 장관은 11월4일 “차기 북핵 6자회담에서 북핵 문제 해결의 돌파구 마련을 위해 농축우라늄 문제 해결 및 핵 폐기에 관한 북측의 전략적 결단을 적극 설득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