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해남 금쇄동에 있는 고산 윤선도 묘.
고산 윤선도에 대해 풍수의 최고 단계인 ‘신안’이라고 극찬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풍수학자이기도 한 정조 임금(주간동아 353호와 448호에 소개됨)이었다.
문학가로 더 잘 알려진 고산 윤선도(1587~1671)는 풍수학사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명당으로 알려진 그의 고가(전남 해남 녹우당)와 무덤엔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풍수지리에 정통한 고산은 효종이 승하하자 좌의정 심지원의 추천으로 왕릉 선정에 참여한다. 그는 여러 곳을 답사하고 난 뒤 수원 땅을 최고의 길지로 추천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송시열, 송준길 등이 반대했기 때문. 훗날 정조는 고산이 추천한 곳의 진가를 알아보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는데 그곳이 바로 수원 옆 화성의 융릉(隆陵)이다.
정조가 ‘신안’으로 인정한 고산의 풍수학맥은 이의신(李懿信, 윤선도와 인척관계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과의 만남을 통해서 형성됐다. 이의신은 해남 맹진 출신으로 1600년 선조 임금 어부인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떴을 때 왕릉 선정에 참여하면서 선조에게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광해군 때는 경기도 파주 교하로 도읍지를 옮기자는 ‘교하 천도론’을 주장해 몇 년 동안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장본인이다.
이러한 이의신와 고산 사이의 ‘명당 빼앗기’ 전설은 이 고장뿐만 아니라 풍수가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의신이 고산의 집에서 기거하고 있을 때, 밤중이면 몰래 말을 타고 집을 빠져나가 새벽녘이면 슬그머니 돌아오곤 했다. 고산은 이의신이 명당을 찾았음을 짐작하고 어느 날 그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해 일찍 잠에 빠지게 했다. 잠이 든 것을 확인한 고산은 평소 이의신이 타던 말을 앞세우고 집을 나섰다. 말은 밤중이면 언제나 가곤 하던 그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 어느 지점에 멈추었다. 자리를 살펴보니 과연 천하의 명당이었다. 고산은 주변에서 썩은 나무막대 하나를 찾아 그 자리에 묻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고산은 이의신에게 자신이 잡아놓은 자리가 하나 있으니 한번 봐달라고 했다. 이의신이 따라가본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이 잡아놓은 자리였다. 이의신이 ‘명당에는 임자가 따로 있다’면서 고산에게 양보하였다.”
전설은 상당 부분 사실인 듯하다. 우선 “녹우당에서 고산 무덤이 있는 금쇄동까지 걸어서 1시간 반 거리도 되지 않기 때문에 어린 시절 걸어서 많이 참배를 하였다”는 고산의 종손 윤형식(녹우당 거주) 선생의 말씀과 전해지는 이야기에 나오는 거리가 비슷하다.
그러나 전설처럼 고산이 이의신의 자리를 빼앗았다기보다는 나이가 훨씬 많은 이의신에게 풍수를 배우는 과정에서 좋은 자리를 추천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로 서얼 출신인 이의신이 금쇄동(고산 묘역 일대)을 사들일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금쇄동의 면적은 120여만평으로서 지금까지 종가 소유로 전해온다.
고산이 사용한 나침반(패철).
바로 이의신이 형세론을 견지했음을 조선왕조실록에서 밝히고 있다. 고산도 철저하게 형세론자였음을 자신이 쓴 ‘산릉의’(1659년)에서 보여준다. 정조 역시 형세론이 중심이 되어야 함을 ‘홍재전서’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조선 후기는 형세론이 주류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고, 현재 해남 금쇄동에 있는 고산의 무덤은 조선 후기 풍수의 특징을 보여주는 곳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