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에서 비밀을 간직한 한국 여성으로 출연 중인 김윤진.
거리에서 사람이 사라진 건 한 편의 드라마 때문이었다. ‘로스트(LOST)’. 영화 ‘쉬리’의 여전사 김윤진이 출연하는 ABC의 미니시리즈다. 한국의 정상급 배우가 처음으로 미국 공중파 드라마에 나온다고 해 방영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바로 그 작품이다. 27일은 김윤진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6회가 방송되는 날이었다.
이날 방송분에는 한국어 대사가 무려 30분 동안이나 나와 한인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미국 드라마에서 외국어가 이토록 오랫동안 자막 처리로 방송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 김윤진과 극중 남편으로 나오는 한인배우 대니얼 데이 김, 그리고 왕년의 스타 김서라까지 등장해 마치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9월22일 첫 방송을 시작한 ‘로스트’는 불과 한 달여 만에 미국 한인사회의 풍속도를 바꿔놓았다. 수요일에는 좀처럼 약속을 잡지 않고 집에 들어가 8시 전에 부랴부랴 저녁 먹곤 거실에 모인다. 이 시간에 전화라도 했다간 눈총받기 십상이다. 어쩔 수 없이 식당이나 바에 있다 해도 TV 화면 앞자리에 앉는 건 기본이다. 방송이 끝난 다음 ‘missyusa.com’ 등 동포 커뮤니티에서 시청 소감을 나누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한 달 만에 한인사회 풍속도 바꿔
미국의 인기 드라마에서 한국인 배우를 보는 것은 한인 교포들에겐 뿌듯한 기쁨이다. 비록 김윤진의 캐릭터와 한국어 대사 수준이 기대에 못 미치긴 하지만 프라임 타임에 한국어와 한국 배우가 당당하게 나오는 모습은 또 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좀처럼 미국 드라마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는 한인들까지 끌어들일 정도이니 ‘로스트’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다. 고작 6회를 방영한 현재 ‘로스트’는 평균 시청률 10%에 점유율 17%대를 기록 중이다. 미국 전역에서 무려 1700만여명이 드라마를 시청했다는 뜻이다. 같은 시간대 프로그램을 모두 평정하고 당당히 시청률 1위에 올라섰다. 전체 시청률도 돌풍 수준이다. 부동의 시청률 황제인 CBS 범죄 수사물 ‘CSI’에 이어 2위다. 한국에서도 방영 중인 ‘CSI’ 시리즈는 평균 시청률 14%대로 인기 가도를 질주하고 있다. 라스베이거스, 마이애미에 이어 뉴욕시리즈가 진행되고 있는 ‘CSI’는 드라마뿐 아니라 전체 TV 프로그램 중 부동의 1위다.
이제 막 뚜껑을 연 미니시리즈가 ‘CSI’의 아성을 위협할 만큼 무서운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점에 대해 미국 방송계도 깜짝 놀라고 있다. ABC 드라마가 이 같은 시청률을 기록한 건 10년 만의 일이다. 점유율 10%대를 기록한 것조차 1995년 방송된 드라마 ‘머더 원’ 이후 처음이다. 김윤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27일 6회는 시청률 10.4%, 점유율 16%로 전국에서 1683만여명이 시청한 것으로 집계됐다.
‘로스트’는 이른바 서바이벌 드라마다. 불의의 사고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생존 스토리다. 최근 수년간 미국 TV에서 가장 잘 팔리는 아이템으로 자리잡은 ‘리얼리티쇼’의 컨셉트를 그대로 가져왔다. 여기에 절묘한 양념이 들어갔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처절한 모습에 ‘미스터리’를 살짝살짝 첨가한 것이다.
남태평양 한 섬에 불시착한 비행기 승객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서바이벌 드라마 ‘로스트’의 출연진.
‘드라마는 생존자 48명 중 14명의 주인공들이 이끌어간다. 매회 한 명의 이야기가 메인 에피소드가 돼 이어지는 독특한 방식이다. 극중 의사 ‘잭’ 역을 맡은 매튜 팍스와 ‘케이트’ 역의 에반젤린 릴리가 극의 중심이다. 케이트는 중범죄를 저질러 항공 호송되던 중 추락해 함께 있던 연방경찰관은 사망하고 혼자만 살아남은 강인한 여성이다. 잭과 더불어 생존자들의 리더 역을 해낸다.
14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남모를 비밀 하나씩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의사 잭은 사망한 아버지 관을 고향으로 운구하던 도중 조난당했다. 동강 난 기체에서 관을 수습해놓았지만 잭은 숲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수차례 발견한다. 관을 다시 열어보니 그 속에 있던 사체는 온데간데없다. 케이트 역시 중범으로 호송 중이었지만 깊은 곡절이 있다. 그녀의 모습은 범죄를 전혀 저지를 것 같지 않다. 그녀는 입을 꽉 다문 채 묵묵히 궂은 일만 하고 있다. 김윤진도 사연이 많다. ‘진’의 아내 ‘선’ 역을 맡은 김윤진은 초반 5회까지 영어를 전혀 못하는 한국인 승객으로 묘사됐다. 각종 사건을 목격하지만 ‘영어’로 표현하지 못해 눈총과 의심을 동시에 받는다. 어눌하고 순진한 ‘외국인’의 모습이다. 하지만 ‘선’의 실제 모습은 전혀 다르다. 영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순진하기는커녕 본성을 감추고 있는 비밀스러운 여인이다.
생존 스토리+미스터리 조화 대성공
김윤진이 주연으로 등장한 27일 6회에서는 ‘선’의 과거가 밝혀졌다. ‘선’은 조직폭력배 보스의 딸로 유흥가 웨이터 ‘진’과 사랑에 빠진다. ‘진’이 그녀의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조건으로 결혼하지만 손에 피를 묻히고 오는 등 점점 변하는 남편이 두려워진 ‘선’은 남편과 아버지에게서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기회가 온 공항에서 결국 포기하고 만다. ‘로스트’의 또 다른 줄거리 축은 미스터리다. 불시착한 섬에는 뭔지 모를 ‘생명체’가 있다. 불가사의한 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리고 잭과 케이트 등 몇몇이 나서 추적해보지만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의혹은 깊어가고, 어쩌면 무인도 전체가 불가사의한 공간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생존자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끊임없는 복선과 암시는 결말에 대한 수많은 억측을 낳고 있다. ‘4차원’ ‘외계인’ 등의 가설들도 나오고, 영화 ‘식스 센스’와 같은 반전이 예상되기도 한다.
현재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로는 ‘죽은 영혼들’일지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로스트’는 10여년 동안 ‘인기 드라마 불모지대’로 수모를 당하던 ABC가 사운을 걸고 제작한 시리즈다. 영화 ‘아마겟돈’과 ‘미션 임파서블3’를 쓴 스타 프로듀서 J. J. 에이브러험에게 제작을 맡겼다. 회당 제작비로만 400만 달러(약 46억원)를 쏟아부었다. 극중 무인도를 재현하기 위해 하와이주의 한 외딴 섬을 통째로 빌려 찍었다. ‘미니시리즈의 귀재’로 불리는 에이브러험은 리얼리티 드라마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스타급은 배제하고 신선한 얼굴들로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1, 2회 극본과 연출을 직접 맡기도 했다.
‘로스트’드라마 장면들(오른쪽).
‘로스트’는 10일 방송되는 8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될 예정이다. 주인공들의 베일이 하나 둘씩 벗겨지면서 의혹들이 풀려나간다. 생존자들과 불가사의한 생명체의 싸움도 본격적으로 이어진다. 미국인 시청자들뿐 아니라 한인사회도 당분간 ‘수요일 저녁 8시’엔 숨죽이고 TV 앞에 모여들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