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의 한 최고위원은 최근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른 김대중 대통령의 경제정책, 즉 ‘DJ노믹스’의 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김대통령은 ‘아시아적 제3의 길’을 찾아 이루고 싶어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아시아적 제3의 길’이란 무엇인가.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장으로 세계적인 석학이면서 블레어 정권의 싱크탱크인 앤서니 기든스가 주창한 ‘제3의 길’은 사회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국가적 복지정책에 기대 ‘놀고 먹어도’ 그뿐인 사회민주주의의 약점과, 오로지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시장패권주의에 기초한 신자유주의의 몰가치성을 함께 극복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 그 근간이다. ‘제3의 길’에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란 수식이 따라붙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굳이 이를 규정한다면 ‘생산적인 사회민주주의의 구현’이라고나 할까. 따라서 ‘제3의 길’은 좌파나 우파의 강경 노선이 아닌, 중도좌파나 중도우파의 온건 노선을 택한다.
영국 노동당의 블레어가 강경 좌파의 노선에서 벗어나 집권하고, 지난 6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둬 영국 노동당 100년 역사에 유례가 없는 2기 연속집권에 성공한 것은 블레어와 기든스의 ‘제3의 길’ 실험이 아직까지는 성공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지난 98년 내한한 기든스는 “유럽 정치는 향후 20년 간 제3의 길 정치로 나갈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지난 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걸쳐 유럽공동체 15개국 중 12개국은 중도좌파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문제는 ‘DJ노믹스’가 추구하는 ‘제3의 길’이 어떤 성격이며, 아시아 혹은 우리 현실에서도 유럽식의 ‘제3의 길’이 가능한가라는 것이다.
우선 김대통령은 집권 이전부터 기든스와 많이 토론했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동시 추구’라는 김대통령 최대의 다짐은 ‘제3의 길’ 노선에서 영향 받은 바가 많은 듯하다. 현 정부가 표방하고 김대통령이 상당한 무게를 두어 강조하는 ‘생산적 복지정책’도 ‘제3의 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별로 없는 고전적인 복지국가 모델의 취약점을 ‘일하는 복지’로 극복하려는 ‘제3의 길’ 방식의 복지정책 쇄신책은 ‘생산적 복지’와 매우 흡사하다.
지난 7월 2년 만에 다시 내한한 앤서니 기든스는 한 강연회에서 김대통령을 ‘중도좌파이면서 제3의 길 정치인’으로 규정했다. “김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생각 속의 영감과 접한 결과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삼스러운 얘기는 아니지만, ‘좌파’라는 단어에 유독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우리 나라에서는 ‘김대통령은 중도좌파’라는 규정 자체가 소모적인 논쟁과 정쟁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한나라당 김만제 정책위의장이 현 정권에 대해 ‘낡은 사회주의식 정책을 추진하는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 정권’이라고 포문을 열고 나선 것은 이데올로기 문제에 관한 우리 사회의 과민반응을 염두에 둔 정치 공세의 성격이 강하다. 그는 자신의 발언에 대한 당 안팎의 비판에도 지난 8월4일 “사회주의자들이 거창하게 서민을 위한다, 평등을 추구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런 주장을 펴다가 망하지 않았느냐”고 재차 포문을 열었지만, 기실 김대중 정권과 정책이 사회주의냐 아니냐는 것은 전혀 문제의 본질이 되지 못한다.
현 정권이 지나치게 ‘시장 개입’을 하기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김만제 의장의 주장대로라면 과거 5공 시절인 지난 85년 재무장관으로서 국제그룹 해체를 진두지휘한 김의장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자인하는 셈이 된다. 그는 지난해 10월 김대통령과 역대 경제부총리·재경부장관 청와대 간담회에서도 “부실업체는 그냥 팔아 없애야 하고, 재경부 장관이 직접 나서서 과감하게 해야 한다. 대우도 분할 매각하는 것이 좋다”고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요구했다.
또한 민주노동당은 “지금 이 나라는 김의장이 우려하는 것처럼 ‘사회주의의 과잉’때문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이상의 결여’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고 정반대의 주장을 편다. 현 정권이 사회 안전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구조조정을 강행하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는 비판론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냐, 신자유주의냐 하는 2분법적 물음은 ‘DJ노믹스’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공허한 질문일 따름이다. 상당수 지식인은 이런 문제제기 자체가 “색깔론을 조장해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치기” 쯤으로 생각한다. 김만제 의장이 속한 서강학파의 대부격인 남덕우 전 부총리도 “정부 간섭 없이 과거 30년의 적폐를 씻어낼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사회주의론에 대해서는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마저 비판적이다.
따라서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고, 본질적인 의문은 현 정권의 여러 정책들이 진짜 ‘제3의 길’의 본질에 다가섰느냐 아니면 ‘어정쩡하고 변질된 제3의 길’을 가느냐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적이라는 비판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르나,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에서는 자유롭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민주당에서 소장파 의원들에 의한 국정쇄신론이 한창 터진 지난해 연말 김대통령의 어조는 단호했다. “당대의 호평을 받지 못해도 역사적 평가를 받는 일을 하겠다. 재임중 칭찬이나 비난은 중요하지 않다. 지지도가 10%로 떨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개혁을 밀고 나가겠다”(12월4일 총재특보단과의 간담회) “영국은 대처 총리의 지도 아래 철저하게 개혁해 경제를 되살렸다. 일시적으로 국민 고통만 줄이는데 급급해 개혁을 늦출 수는 없다”(12월19일 국무회의).
그러나 그로부터 7개월여가 흐른 지금, 더 이상 ‘대처리즘’의 강경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사실상 대처리즘 자체가 ‘생산적 복지’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신자유주의의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현 정권의 대표적 이데올로그의 한 사람인 황태연 동국대 교수(정치학)는 “보수당 정부하에서 영국의 부유층은 더욱 살찐 반면, 국민대중은 경제발전과 성과분배에서 배제되어 사회생활은 오히려 퇴락했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개혁에는 신자유주의적 대처리즘을 표방하고, 복지정책에는 ‘제3의 길’ 방식의 ‘생산적 복지’를 내세우는 ‘DJ노믹스’는 그 자체가 서로 상충하는 모순을 지녔다는 비판론이 제기된다.
경제전문가의 한 사람인 한국신당 김용환 대표가 지난해 말 국회 예결위 정책질의를 통해 “생산적 복지와 경제의 효율성을 같이 이룩하려는 이상은 좋지만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이 현 시점에선 한국경제의 체질적 개혁을 저해하는 것이 아닌지 심각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DJ노믹스에 대해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의원의 지적처럼 ‘생산적 복지’의 추구가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서민층을 붙잡거나, 경제의 탄력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 효과는 적은 듯하다. 최근 민주당이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당’임을 다시 강조하면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국민연금 확대, 주 5일 근무제, 교원 사기 진작방안, 각종 감세정책 등을 봇물처럼 양산한 것은 ‘고강도 개혁의 남발’이 결국 집토끼도 산토끼도 다 도망가게 했다는 집권당 내부 비판에 따른 반작용으로 보이기도 한다. 대수술하기 전에 일단 허약한 체질을 수술을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강화해 놓아야 하는데, 그런 절차 없이(혹은 무시하고) 고강도의 샘플주사를 놓은 결과 현재의 경제적 혼란이란 부작용을 낳았고, 내년 대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탓에 다시 ‘경기부양책’ 같은 타협 노선으로 돌아섰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DJ노믹스에 의한 개혁 추진이 국론분열의 실마리가 된 것은 아닌지 심각한 자기 반성이 필요한 듯하다. 학계 인사들은 “DJ노믹스가 통하는 시대는 지난 듯한데도, 여전히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고 지적한다. 한나라당 주장처럼 현 정권이 의도적으로 개혁 대 반개혁으로 국론을 분열시킨 것은 아니더라도, 국민통합을 담보하지 못한 고강도 처방의 부작용은 의약분업의 예에서도 익히 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개혁의 방향과 목표는 옳더라도 사전 처방으로서의 국민적 참여와 통합을 실현하지 않으면 그만큼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김대통령은 어쩌면 재임중 ‘아시아적 제3의 길의 모델’을 완성하겠다는 생각에 지금도 함몰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집권 세력은 이같은 노선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이끌어 내는 데 실패했다. 또한 이를 추진하는 세력 자체의 능력도 ‘야당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현재 국론의 분열과 갈등의 확대 재생산은 이처럼 ‘이상만 높고 실행력이 떨어지는’ 개혁주체의 ‘생산성’이 담보되지 못한 탓도 크다. 그나마 국민적 통합이 선행되면 좌-우의 날개로 비상하는 신모델 창출의 기틀이라도 마련할 수 있겠지만, 그것 없이는 좌-우의 협공만 남을 뿐이다.
그렇다면 ‘아시아적 제3의 길’이란 무엇인가.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장으로 세계적인 석학이면서 블레어 정권의 싱크탱크인 앤서니 기든스가 주창한 ‘제3의 길’은 사회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국가적 복지정책에 기대 ‘놀고 먹어도’ 그뿐인 사회민주주의의 약점과, 오로지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시장패권주의에 기초한 신자유주의의 몰가치성을 함께 극복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 그 근간이다. ‘제3의 길’에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란 수식이 따라붙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굳이 이를 규정한다면 ‘생산적인 사회민주주의의 구현’이라고나 할까. 따라서 ‘제3의 길’은 좌파나 우파의 강경 노선이 아닌, 중도좌파나 중도우파의 온건 노선을 택한다.
영국 노동당의 블레어가 강경 좌파의 노선에서 벗어나 집권하고, 지난 6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둬 영국 노동당 100년 역사에 유례가 없는 2기 연속집권에 성공한 것은 블레어와 기든스의 ‘제3의 길’ 실험이 아직까지는 성공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지난 98년 내한한 기든스는 “유럽 정치는 향후 20년 간 제3의 길 정치로 나갈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지난 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걸쳐 유럽공동체 15개국 중 12개국은 중도좌파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문제는 ‘DJ노믹스’가 추구하는 ‘제3의 길’이 어떤 성격이며, 아시아 혹은 우리 현실에서도 유럽식의 ‘제3의 길’이 가능한가라는 것이다.
우선 김대통령은 집권 이전부터 기든스와 많이 토론했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동시 추구’라는 김대통령 최대의 다짐은 ‘제3의 길’ 노선에서 영향 받은 바가 많은 듯하다. 현 정부가 표방하고 김대통령이 상당한 무게를 두어 강조하는 ‘생산적 복지정책’도 ‘제3의 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별로 없는 고전적인 복지국가 모델의 취약점을 ‘일하는 복지’로 극복하려는 ‘제3의 길’ 방식의 복지정책 쇄신책은 ‘생산적 복지’와 매우 흡사하다.
지난 7월 2년 만에 다시 내한한 앤서니 기든스는 한 강연회에서 김대통령을 ‘중도좌파이면서 제3의 길 정치인’으로 규정했다. “김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생각 속의 영감과 접한 결과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삼스러운 얘기는 아니지만, ‘좌파’라는 단어에 유독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우리 나라에서는 ‘김대통령은 중도좌파’라는 규정 자체가 소모적인 논쟁과 정쟁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한나라당 김만제 정책위의장이 현 정권에 대해 ‘낡은 사회주의식 정책을 추진하는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 정권’이라고 포문을 열고 나선 것은 이데올로기 문제에 관한 우리 사회의 과민반응을 염두에 둔 정치 공세의 성격이 강하다. 그는 자신의 발언에 대한 당 안팎의 비판에도 지난 8월4일 “사회주의자들이 거창하게 서민을 위한다, 평등을 추구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런 주장을 펴다가 망하지 않았느냐”고 재차 포문을 열었지만, 기실 김대중 정권과 정책이 사회주의냐 아니냐는 것은 전혀 문제의 본질이 되지 못한다.
현 정권이 지나치게 ‘시장 개입’을 하기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김만제 의장의 주장대로라면 과거 5공 시절인 지난 85년 재무장관으로서 국제그룹 해체를 진두지휘한 김의장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자인하는 셈이 된다. 그는 지난해 10월 김대통령과 역대 경제부총리·재경부장관 청와대 간담회에서도 “부실업체는 그냥 팔아 없애야 하고, 재경부 장관이 직접 나서서 과감하게 해야 한다. 대우도 분할 매각하는 것이 좋다”고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요구했다.
또한 민주노동당은 “지금 이 나라는 김의장이 우려하는 것처럼 ‘사회주의의 과잉’때문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이상의 결여’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고 정반대의 주장을 편다. 현 정권이 사회 안전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구조조정을 강행하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는 비판론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냐, 신자유주의냐 하는 2분법적 물음은 ‘DJ노믹스’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공허한 질문일 따름이다. 상당수 지식인은 이런 문제제기 자체가 “색깔론을 조장해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치기” 쯤으로 생각한다. 김만제 의장이 속한 서강학파의 대부격인 남덕우 전 부총리도 “정부 간섭 없이 과거 30년의 적폐를 씻어낼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사회주의론에 대해서는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마저 비판적이다.
따라서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고, 본질적인 의문은 현 정권의 여러 정책들이 진짜 ‘제3의 길’의 본질에 다가섰느냐 아니면 ‘어정쩡하고 변질된 제3의 길’을 가느냐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적이라는 비판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르나,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에서는 자유롭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민주당에서 소장파 의원들에 의한 국정쇄신론이 한창 터진 지난해 연말 김대통령의 어조는 단호했다. “당대의 호평을 받지 못해도 역사적 평가를 받는 일을 하겠다. 재임중 칭찬이나 비난은 중요하지 않다. 지지도가 10%로 떨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개혁을 밀고 나가겠다”(12월4일 총재특보단과의 간담회) “영국은 대처 총리의 지도 아래 철저하게 개혁해 경제를 되살렸다. 일시적으로 국민 고통만 줄이는데 급급해 개혁을 늦출 수는 없다”(12월19일 국무회의).
그러나 그로부터 7개월여가 흐른 지금, 더 이상 ‘대처리즘’의 강경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사실상 대처리즘 자체가 ‘생산적 복지’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신자유주의의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현 정권의 대표적 이데올로그의 한 사람인 황태연 동국대 교수(정치학)는 “보수당 정부하에서 영국의 부유층은 더욱 살찐 반면, 국민대중은 경제발전과 성과분배에서 배제되어 사회생활은 오히려 퇴락했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개혁에는 신자유주의적 대처리즘을 표방하고, 복지정책에는 ‘제3의 길’ 방식의 ‘생산적 복지’를 내세우는 ‘DJ노믹스’는 그 자체가 서로 상충하는 모순을 지녔다는 비판론이 제기된다.
경제전문가의 한 사람인 한국신당 김용환 대표가 지난해 말 국회 예결위 정책질의를 통해 “생산적 복지와 경제의 효율성을 같이 이룩하려는 이상은 좋지만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이 현 시점에선 한국경제의 체질적 개혁을 저해하는 것이 아닌지 심각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DJ노믹스에 대해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의원의 지적처럼 ‘생산적 복지’의 추구가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서민층을 붙잡거나, 경제의 탄력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 효과는 적은 듯하다. 최근 민주당이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당’임을 다시 강조하면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국민연금 확대, 주 5일 근무제, 교원 사기 진작방안, 각종 감세정책 등을 봇물처럼 양산한 것은 ‘고강도 개혁의 남발’이 결국 집토끼도 산토끼도 다 도망가게 했다는 집권당 내부 비판에 따른 반작용으로 보이기도 한다. 대수술하기 전에 일단 허약한 체질을 수술을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강화해 놓아야 하는데, 그런 절차 없이(혹은 무시하고) 고강도의 샘플주사를 놓은 결과 현재의 경제적 혼란이란 부작용을 낳았고, 내년 대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탓에 다시 ‘경기부양책’ 같은 타협 노선으로 돌아섰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DJ노믹스에 의한 개혁 추진이 국론분열의 실마리가 된 것은 아닌지 심각한 자기 반성이 필요한 듯하다. 학계 인사들은 “DJ노믹스가 통하는 시대는 지난 듯한데도, 여전히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고 지적한다. 한나라당 주장처럼 현 정권이 의도적으로 개혁 대 반개혁으로 국론을 분열시킨 것은 아니더라도, 국민통합을 담보하지 못한 고강도 처방의 부작용은 의약분업의 예에서도 익히 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개혁의 방향과 목표는 옳더라도 사전 처방으로서의 국민적 참여와 통합을 실현하지 않으면 그만큼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김대통령은 어쩌면 재임중 ‘아시아적 제3의 길의 모델’을 완성하겠다는 생각에 지금도 함몰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집권 세력은 이같은 노선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이끌어 내는 데 실패했다. 또한 이를 추진하는 세력 자체의 능력도 ‘야당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현재 국론의 분열과 갈등의 확대 재생산은 이처럼 ‘이상만 높고 실행력이 떨어지는’ 개혁주체의 ‘생산성’이 담보되지 못한 탓도 크다. 그나마 국민적 통합이 선행되면 좌-우의 날개로 비상하는 신모델 창출의 기틀이라도 마련할 수 있겠지만, 그것 없이는 좌-우의 협공만 남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