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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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오는 두 갈래 길

  • 노만수 학림논술연구소 콘텐츠실장·서울디지털대 문창과 초빙교수

    입력2007-02-26 09: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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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간동아’의 인기 연재물 ‘Weekly 理知논술’이 이번 호부터 한층 새로워진 모습으로 독자 여러분께 다가갑니다. △ 문학, 영화, 그림, 희곡 등 다양한 문화예술 작품을 통해 논술의 혈맥을 짚어주는 ‘문화로 찾는 논술 비전’ △ 자주 출제되는 논술 주제를 정리한 ‘불멸의 논술 테마’ △ 최신 논술정보, 출제경향 및 기출문제 분석 등을 다루게 될 ‘논술 트렌드 따라잡기’ 등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그동안 ‘주간동아’만의 차별화된 논술 콘텐츠로 성가를 높여온 기존 연재물인 △‘주간동아로 배우는 시사논술’ △‘네 안의 창의력을 깨워라’는 계속될 예정입니다. 앞으로도 ‘주간동아’는 대입 수험생에게 알차고 실속 있는 논술지면을 제공해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새 연재물은 통합교과논술 부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학림논술연구소가 제공합니다. <편집자 주>
    평화가 오는 두 갈래 길
    기원전 307년. 전국칠웅이 격렬한 싸움을 일삼던 전국시대. 조나라는 연나라를 치기 위해 10만 대군을 파견한다. 두 나라 길목의 샌드위치 ‘소국과민(小國寡民)’ 양나라는 풍전등화 신세. 왕 양계는 묵가 집단에 실낱같은 희망을 건다. 한데 원군은 혁리(유덕화 분) 단 한 사람. 양계는 혁리를 마구간에 재울 정도로 문전박대한다. 하지만 혁리는 왕궁을 허물어 옹성을 쌓고 궁수대장 자단과 양적 왕자의 충성, ‘아랫것들과 함께하는’ 민본주의로 조나라의 맹공을 물리친다. 심지어 여성기병대장 일열의 연심, 적국 총사령관 항엄중(안성기 분)에게 톡톡한 적장 예우까지 받는다.

    영화 ‘묵공(墨攻)’(장지량 감독)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전국시대)을 ‘비공(非攻·전쟁 반대)’과 ‘겸애(兼愛·차별 없는 사랑)’라는 키워드로 풀어낸다. 실제로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묵적(기원전 475~기원전 396)은 직접 초나라로 가서 공격을 중지할 것을 권고했고 그의 제자 300명에게 송나라에서 초나라 병사를 기다리게 했다(‘묵경’ 공수편). ‘묵경’은 ‘사다리 공격 방어(備梯)’ ‘물 공격 방어(備水)’ 등 30편이 방어전술론이다. 공격법은 없다. 손무와 손빈의 ‘손자병법’이 공격용 병서라면 ‘묵경’은 수비용 병서인 셈이다.

    “혼란은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 천하를 어지럽히는 것들은 모두 여기에 원인이 있다. 이것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살펴보면 모두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 묵자, ‘겸애’ 2006 한국외대 정시논술

    ‘비공’은 ‘사해동포주의(兼愛)’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이나 다름없다. 옹성을 쌓을 때 왕궁을 허물고, 귀족 기마병까지 노역에 동원하면서 ‘왕·귀족·평민·노예의 벽’까지 헐어내려는 혁리의 행동철학에서 그것을 읽어낼 수 있다. 친분·신분·국적·성별·종교를 떠나 서로를 사랑하면 천하태평성세라는 이상주의다. ‘약자를 위한 전쟁(비공)’은 ‘공격이 아닌 것(非攻)’이다.

    ‘겸애(兼愛)’는 표면적으론 유학의 인(仁)과 엇비슷하다. 하지만 맹자가 묵자의 겸애를 비현실적이고 부모 형제도 몰라보는 짐승의 감정이라고 터부시했던 것처럼, 겸애는 유가의 혈연이나 친소관계에 얽매인 차별적 사랑과는 천지 차이다.



    묵가의 겸애가 모든 차이를 무시한 무차별적 사랑의 세계시민정신(인류사랑)이라면 공맹의 ‘별애(別愛·차별적 사랑)’는 신분·국적·성별·친소를 나누는 배타적 사랑이다. 겸애는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내주라’는 예수의 말과 통한다. 그러나 묵자는 약자가 뺨을 맞으면 그를 위해 협객처럼 일어선다. 정의는 구호나 명분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비공은 그래서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보다는 ‘전투적 평화주의=방어만을 위한 조건부적 폭력 허용=비공(非攻)’인 셈이다. 프랑코 파시즘에 맞서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모인 스페인 내전 당시 국제주의자들의 ‘카탈로니아 찬가’(조지 오웰) 같다.

    그래서 묵자의 비공은 평화를 위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 즉 힘에 의한 평화와는 다르다. 또한 “평화는 어떠한 경우이든, 무슨 일이 있어도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여야 한다는 노르웨이 평화학자 요한 갈퉁의 ‘과정의 평화학’이나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칸트의 윤리학과도 다른 아주 독특한 사상이다. 전공에 대한 사례도 일절 거절하는 혁리 또한 쿠바의 고위직을 마다하고 볼리비아 혁명전선으로 뛰어든 체 게바라나, 월급 한 푼 받지 않고 스페인 내전과 중국 내전에 뛰어들어 부상병들을 치료한 캐나다 닥터 노먼 베순을 떠오르게 한다.

    그렇다면 ‘하늘의 도리(天道)’는 혁리의 선의를 과연 사랑했는가. 사마천(기원전 145~기원전 86)은 “천도(天道)는 사사로움이 없어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라고 하였다.

    “백이, 숙제는 인덕(仁德)을 쌓고 행실이 깨끗했으나 굶어 죽었고, 공자 제자 중에서 가장 학문을 좋아하였던 안연은 가난해서 거친 음식조차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요절하고 말았다. 사람을 회로 먹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도둑놈’ 도척은 천수(天壽)를 다 누리고 자연사했다. 만약 천도가 참으로 존재한다면,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었겠는지 심히 의혹스러울 뿐이다.”

    - 사마천 ‘사기’ 중 ‘백이숙제 열전’ 2003 한국외대 정시논술  

    도대체 왜 의로운 혁리는 배신당하고 그를 따르던 이들은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공명정대한 항엄중과 일열은 죽고 말았을까. 역시 사마천의 질문은 늘 유효하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면, 이것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 - 1996 이화여대 논술

    만약 천도가 ‘(현실) 세상의 도리(世道)’보다 앞선다면 혁리(묵가)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평화도 얻어야 했다. 하지만 ‘힘(강대국)에 의한 평화’를 갈망하던 한비자의 법가(法家)를 국가정책으로 삼은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법가 이외의 학파는 분서갱유의 운명을 맞았다.

    쮌 영화 ‘묵공’이 물처럼 낮은 데로 흘러 백성의 아픔을 달래며 ‘전쟁반대(비공) 평화적 상호의존’을 외친 반면, 영화 ‘영웅’(장예모 감독)은 불처럼 피어올라 ‘힘에 의한 평화=진나라 일극주의’가 평화의 가능태임을 설파한다. 팍스진나라(진나라에 의한 안정과 평화) 찬가다. 그래서 결국 자객 ‘무명’(이연걸 분)은 진시황을 죽일 수 없었다. 연나라의 실존인물인 자객 형가처럼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지만, 형가와는 딴판으로 마지막에 ‘영웅’ 진시황(진도명 분)의 논리에 자발적 복종을 한다. 천하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작은 원망’(약소국의 비애)은 버려야 한다는 자기합리화였다. 영화 ‘영웅’을 당대적으로 해석하면 중국 내부의 ‘중화민족 대가정주의’, 국제적으론 ‘중화주의’를 미화하는 문화 메가폰에 불과하다.

    진나라 이후 묵가사상은 남았지만 묵가군은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영화 ‘묵공’의 결말도 짠하다. 힘을 숭배하는 권력(왕 양계)만 승자독식을 한다. 그리하여 영화 ‘묵공’은 궁형의 수치를 참으며 ‘의인’ 백이숙제를 열전의 서두에 기록한 사마천처럼, 지고 말 테지만 겸애와 비공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옛사람(혁리)을 살려냈다고, 그래서 ‘패자·인간의 도덕·천도(天道)의 역사’를 기록한 ‘묵공’은 ‘승자·권력의 도덕·약육강식의 세도(世道)의 역사’를 기록한 ‘진시황 추모작’ ‘영웅’을 질타하는 영화다.

    천하를 위해 일하다 9년 동안 자기 집 문 앞을 세 번 거쳐간 우 임금을 숭상하던 묵가 집단은 “대부분 짐승가죽 옷과 베옷을 입고 나막신이나 짚신을 신고 밤낮을 쉬지 않았으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삶의 표준으로 삼았던(장자)”, 누구나 평화롭게 살며(비공·非攻) 가진 것을 골고루 나누고 아껴 쓰는 절검(節儉)의 “위대한 평민사상가, 노동계급 철학의 대표(곽말약)”들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묵자가 살아 있다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어떻게 했을까. 프랑스나 독일처럼 반대성명을 냈을까, 아니면 대한민국 자이툰 부대에 지원했을까. 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꿈꾼 아랍 민족을 위해 싸운 영국 군인이자 고고학자인 ‘아라비아의 로렌스’처럼 무자헤딘(이슬람 전사)에 지원했을까.

    ‘타인의 이로움=자신의 이로움(交相利)’을 주장한 묵자는 공리주의자였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벤담)보다는 모든 사람의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하여 행동했다는 측면에서, ‘옆의 가난= 먼 가난(이익 평등 고려의 원리·Principle of Equal Consideration)’이라는 피터 싱어의 ‘세계화의 윤리’(성균관대 2007 정시논술)와 닮았다. 인종·성별·국적 등의 차이로 차별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즘 묵가가 살아 있다면 그래서 피터 싱어처럼 동물에게까지 겸애를 확장했을지 모른다.

    생각 & 토론거리
    1. 묵가 집단은 강철규율로 유명하다. 일열은 혁리에게 연정을 품는다. 하지만 혁리(예수)는 ‘일열’을 ‘창녀’ 막달라 마리아처럼 대한다. 이성애는 사해동포주의(겸애) 앞에선 한없이 작은 감상덩어리일 뿐일까.

    2. 유가의 ‘별애’와 묵가의 ‘겸애’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현대인의 가치관과 어울리는가.

    3. 다음 글을 읽고 맹자와 한비자 중 누구 입장을 지지하는가.

    “양주(楊朱)는 자기만을 위하는 입장을 취해서 털 한 올이라도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한다 하더라도 하지 않는다.”(맹자)

    “지금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다. 그는 위험한 성(城)에 들어가지 않으며, 군대가 있는 곳에 머물지 않으며, 세상의 큰 이익을 위해 자기의 정강이 털 한 올도 바꾸지 않는다. 세상의 군주가 그를 따르고 예로 대하며 그의 지혜를 귀하게 여기고 그의 행동을 고상하게 여겨 사물(事物)을 가볍게 보고 생명을 중시하는 선비라고 생각한다.”(한비자)

    - 경희대 2006 수시-2 제시문

    4.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을 나쁘게만 보지 않는다. 이기심은 인간의 자율성을 증대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 본능’에 충실한 사회가 ‘묵자의 이타심(겸애)’에 기초한 사회보다 발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묵자 대 애덤 스미스, 누구의 인간본성 이론을 지지하는가.

    - 한국외대 2006 정시논술

    5. 정의로운 전쟁은 존재하는가(1998). 폭력은 필요악인가(1991). - 프랑스 바칼로레아 논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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