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가 검서관으로 일했던 서울 창덕궁 내 규장각 건물인 주합루.
이덕무의 연행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남기고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역시 이덕무와 책의 관계다. 책에 미친 이덕무였으니, 베이징의 책시장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가 남긴 ‘연행기’를 줄거리 삼아 그와 함께 베이징 책시장을 구경해보자.
이덕무가 유리창에 간 것은 5월17일이었다. 역관 김재협(金在協)이 무령현(撫寧縣)에서 만났던 서소분(徐紹芬)이란 사람의 편지를 유리창 북쪽에 사는 서소분의 아우 서소신(徐紹新)에게 전하러 갔는데, 이덕무와 박제가는 김재협을 따라가서 서소신을 만나고 필담을 나눈다. 서소신은 ‘사고전서(四庫全書)’ 등교관(謄校官)이었다. 한 달에 5만 자 분량의 책을 필사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으니 서소신은 당연히 지식분자다. 필담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유리창을 본격적으로 탐사한다. 책과 서화, 골동품, 비단, 옥기(玉器) 등도 샀다(가난뱅이 이덕무가 웬일인가?). 구경과 쇼핑(?)에 몰두하다 보니 피곤하기 짝이 없다. 조선 촌사람 둘은 어깨를 비비고 지나갈 정도로 빽빽한 유리창의 인파에 두통이 날 지경이었다.
이틀을 쉬고 5월19일 이덕무는 박제가와 함께 다시 유리창 책방 순례에 나선다. 부지런하고 꼼꼼한 이덕무는 조선에 없는 책과 희귀본 목록을 길게 작성한다. 목록을 작성한 책방은 숭수당(嵩秀堂), 문수당(文粹堂), 성경당(聖經堂), 명성당(名盛堂), 문성당(文盛堂), 취성당(聚星堂), 대초당(帶草堂), 욱문당(郁文堂), 문무당(文茂堂), 영화당(英華堂), 문환재(文煥齋) 등 모두 11곳이었다. ‘연행기’에 남아 있는 그 목록은 학문적 차원에서 여러모로 흥미롭지만, 여기서 따질 성격의 것은 아니다. 11곳의 서점들은 조선의 사신단(使臣團)이 베이징에 도착하면 반드시 찾는 곳이었다. 이 서점들이야말로 18세기 후반부터 조선에 책을 쏟아 부은 풀(pool)이었으니, 조선 후기의 학문적·사상적 변화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곳이다.
책을 사랑했던 이덕무와 벗들은 ‘백탑’ 아래에서 모임을 갖고 책과 세상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친분을 쌓았다. 이 때문에 이들은 ‘백탑파’라고 불렸다.
흔해빠진 책들만 수입하던 풍조 꼬집기도
5월25일 이덕무는 박제가와 함께 천주당을 찾아갔으나, 신부가 없어 자세히 구경하지 못한다. 낙담하여 돌아오는 길에 다시 유리창 서점가를 방문한다. 그리고 전에 보지 못했던 책방 서너 곳을 찾아낸다. 그중 오류거(五柳居)란 서점에서 주인 도옥(陶鈺)과 안면을 튼다. 도씨는 책 거상(巨商)이었다. 도씨는 이렇게 말한다.
책을 실은 배가 강남(江南)에서 와 통주(通州) 장가만(張家灣)에 정박했는데,
모레 이곳으로 실어올 것이다. 모두 4000여 권이다.
도씨는 사고전서관에 책을 납품하는 상인이었다. 그가 운하를 통해 배로 책을 베이징으로 실어온 것은 바로 책의 납품 때문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일개 서점이 책을 배로 실어 운반하다니! 이덕무는 충격을 받는다. 그는 박제가와 함께 도씨의 오류거에서 발간한 책목록을 빌려 돌아오면서 그 충격의 소회를 말한다. “이 목록에는 내가 평생 구하려던 책만이 아니라 천하의 기이한 책이 엄청나게 많았다. 나는 이제야 절강(浙江)이 서적의 본고장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덕무는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절강 지방에서 출판된 서적을 소개하는 ‘절강서목(浙江書目)’ 최신판을 구입했는데, 오류거의 목록에는 ‘절강서목’에도 없는 책이 있었던 것이다.
오류거 주인 도옥과 일단 안면을 트자 그 뒤로는 무상출입이다. 이덕무는 5월28일 박제가와 함께 오류거를 찾아갔으니, 앞서 도씨가 말한 바 있는 절강에서 배편으로 싣고 온 ‘기서(奇書)’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간 김에 서장관 심염조가 부탁한 ‘경해(經解)’와 마숙(馬)의 ‘역사(繹史)’ 등 희귀본을 비롯해 수십여 종의 책을 주문한다.
6월2일 이덕무는 다시 오류거로 가서 주문했던 주이존의 ‘경해’ 60갑(匣)을 열람한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덧붙인다.
‘경해’는 죽타(竹) 주이존(朱彛尊)과 담포(憺圃) 서건학(徐乾學)의 소장 서적을 다 수집하고, 거기다 수수(秀水)의 조추악(曹秋岳), 무석(無錫)의 진대암(秦對巖), 상숙(常熟)의 전준왕(錢遵王)·모부계(毛斧季), 온릉(溫陵)의 황유태(黃兪邰) 장서를 빌려 모은 것으로 140여 종이나 된다. ‘자하역전(子夏易傳)’부터 당(唐)나라 사람의 저술은 겨우 2, 3종이고 그 나머지는 대부분이 송(宋)·원(元) 제유(諸儒)의 찬술(撰述)이다. 명나라 사람의 저술도 1, 2종이 끼여 있다. 정말로 유학과 경학(經學)의 거창한 숲인 것이다.
이덕무의 책을 현대에 맞게 꾸미거나 그의 사상과 지식을 다룬 책들.
이덕무는 ‘경해’를 실마리로 삼아 조선의 서적 수입이 내포한 문제를 지적한다. ‘경해’는 경전에 관한 역대의 모든 문헌을 수집한 거대한 자료집이었던 것이다. ‘경해’를 이루는 저작들의 대부분은 이덕무가 밝히고 있듯, 주이존(1629~1709)과 서건학(1631~1694)의 장서였다. 주이존의 ‘경의고(經義考)’와 서건학의 ‘독례통고(讀禮通考)’가 경학사(經學史)의 기념비적 저작이듯, 두 사람은 17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장서가였다. 이들의 박학(博學)에 기초한 경전 연구는 이덕무의 말처럼 거의 100년이 지난 18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조선에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청대 학문의 정수라고 할 ‘경해’의 존재는 까마득히 모르고 국내에서도 흔해빠진 연의소설이나 ‘당송팔대가문초’ ‘당시품휘’만 수입하고 있다는 그의 지적은 실로 통절하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경해’는 이덕무에게만 충격을 준 것이 아니었다. 실로 베이징 책시장의 서적들은 낙후한 조선 후기 학계 전반에 파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경해’를 구입한 사람은 앞서 말했다시피 심염조였다. 또 심염조는 이덕무를 베이징에 갈 수 있도록 주선해준 사람이다. 그는 베이징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덕무와 어떤 책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그대(이덕무)가 예전에 정림(亭林) 고염무(顧炎武)의 곧은 지조를 높이 평가하여 명말(明末)의 제일가는 인물이라 하였기에, 그의 문집을 오류거(五柳居) 도씨의 책방에서 구입하였소. 도씨가 요즈음 금서가 300여 종이 있는데, ‘정림집(亭林集)’도 그중 하나이니 꼭꼭 숨겨 가라고 신신당부하였소. 내가 이번에 가마 속에서 ‘정림집’을 다 읽었는데, 정말 명말 유민(流民) 중 제일가는 인물이었소. 절의(節義)가 고금에 으뜸일 뿐만 아니라 시문(詩文)도 법도가 있고 우아하여 무심(無心)한 말은 하지 않았소.”
“정림은 비록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명나라를 잊지 않았고 강희(康熙) 기미년(1679)의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도 나아가지 않았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대신(大臣)입니다. 그가 지은 ‘일지록(日知錄)’은 경(經)과 사(史)를 돕는 우익이 될 만하니, 그 박학함을 알 수 있습니다.”
고염무(1613~1682)는 명말청초의 대학자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 청 왕조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지조를 지킨 저항적 지식인이다. 그의 저작이 금서가 된 것은 청나라에 협조하지 않은 정치적 태도 때문이었다.
귀국 후 규장각 검서관으로 첫 취직
고염무는 양명학의 공소(空疎)함을 비판하여 현실적·실증적 학문에 몰두했다. 쉽게 말해 중국판 실학(實學)이다. 그가 엄밀한 문헌적 증거에 토대를 두고 경전과 역사, 문학, 지리, 풍속 등 다방면의 문제를 다룬 ‘일지록’을 저작한 것은 청대 고증학의 출발을 알리는 하나의 학문사적(學問史的) 사건이 된다. 이덕무는 베이징에 가기 전 3년을 찾아 헤맨 끝에 어떤 사람이 비장(秘藏)한 ‘일지록’을 어렵게 빌려 읽고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이 책의 존재를 주위에 이야기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심염조였던 것이다. 어쨌든 심염조와 이덕무가 고염무와 ‘정림집’ ‘일지록’에 대해 신선한 어조로 대화한 것은 고염무 사후 거의 1세기가 지난 뒤다. 야박하게 말하면 조선의 학문은 1세기가 뒤져 있었고, 베이징 책시장이 열리자 비로소 그 100년의 차이를 인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홍대용의 연행 무렵부터 조선인들에게 열리기 시작했던 유리창의 서적시장은 조선 사람들을 새로운 학문과 예술의 세계로 인도한다. 조선의 지식인은 유리창에서 이적(夷狄)의 문화가 아닌 난숙한 제국(帝國)의 문화를 인지하고 그것을 배우자고 주장했으니, 이른바 북학(北學)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사고전서’의 편찬은 베이징 유리창으로 서적을 집적했고, 그 집적된 서적이 조선으로 흘러넘쳐 조선 후기 학계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아마도 베이징에서 수입된 서적의 존재가 없었다면 정약용의 방대한 저술은 저작되지 못했을 것이고, 희한하고 참신한 문체로 쓰인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이듬해 이덕무는 39세의 나이에 생애 최초로 취직을 했다. 규장각의 검서관(檢書官)이 되었던 것이다. 규장각 검서관은 규장각에서 출판하는 모든 책을 교정하는 직임이다. 책벌레 이덕무는 자신의 소원대로 책을 읽는 것이 직업이 되었다.
그는 1793년 사망하는 해까지 규장각을 벗어나지 않았다. 한데 이덕무를 규장각에 거둔 정조는 베이징의 서적이 조선의 문단과 사상계에 불러일으킨 진보적 동태를 이단으로 몰아 탄압하려 했다. 박지원과 박제가 등은 물론, 이덕무 역시 정조가 비판하고 억압하고자 했던 새로운 사고의 범위 속에 있었다.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자신이 불러들인 인물들을 억압하다니…. 이래서 이야기는 또 다른 쪽으로 옮겨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