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과 관련된 19개 혐의 전부를 무죄 판결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2부(부장판사 박정제·지귀연·박정길)는 판결문에서 검찰의 핵심 증거 압수수색 과정의 위법성을 이렇게 지적했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이 회장 1심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152쪽 분량의 ‘위법 수집증거 목록’을 적시하면서 검찰이 제출한 주요 증거 상당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판결문 중 61쪽을 할애해 △삼성바이오로직스 18TB(테라바이트) 백업 서버, 삼성바이오에피스 네트워크 결합 스토리지(NAS) 서버 △회계법인 관계자 노트북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미전실) 차장 휴대전화에서 추출한 문자메시지 △APG자산운용 이사의 전화 진술 녹음파일 및 녹취서 △재전문진술(타인의 전문진술을 들었다는 진술) 등 5개 항목의 증거능력을 살펴 그중 회계법인 관계자 노트북을 제외한 4개에 대해 “유죄 인정의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각종 서버 등 전자 정보저장매체와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 휴대전화에 대한 검찰 압수수색이 “영장주의와 적법절차 원칙을 위반했다”고 밝혔다. 검찰이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증거를 바탕으로 피고인 및 관련자로부터 확보한 진술인 ‘2차적 증거’ 능력도 형사소송법 제308조의2(위법 수집증거의 배제)에 따라 인정받지 못했다. 1심 판결에 대해 검찰은 2월 8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따른 그룹 지배권 승계 목적과 경위, 회계부정과 부정거래행위에 대한 증거 판단, 사실 인정 및 법리 판단에 관해 1심 판결과 견해차가 크다”며 항소했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뉴시스]
위법 증거 토대로 확보한 ‘2차적 증거’도 불인정
1심 재판부가 이 회장은 물론, 함께 기소된 삼성그룹 최지성 전 미전실 실장, 김종중 전 미전실 전략팀장, 장충기 전 차장 등 나머지 피고인 13명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한 데는 검찰의 증거 수집이 상당 부분 위법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판결문을 바탕으로 재판부가 지적한 검찰 증거 확보 과정의 문제점을 정리했다.삼성바이오로직스 백업 서버
재판부는 증거능력 판단에서 ‘삼성바이오로직스 백업 서버’에 단일 증거로는 가장 많은 분량(약 9쪽)을 할애해 ㉮~㉸항에 걸쳐 상세히 분석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검찰은 영장주의와 적법절차의 원칙, 이 사건 영장에 기재된 압수 대상 및 방법의 제한을 위반해 이 사건 삼성바이오로직스 서버 등에 저장된 전자정보를 위법하게 압수·수색했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월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법원을 나서고 있다. [뉴스1]
파일 778만 개 압수, 12개 폴더만 변호인에게 보여줘
검찰은 2019년 5월 7일 인천 연수구 삼성바이오로직스 공장을 압수수색했다. 당시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삼성바이오로직스 3공장 회의실과 1공장 통신실 바닥 아래에서 메인 및 백업 서버, 외장하드 2대, 업무용 PC 26대 등을 찾아 압수했다. 세간에서 이른바 ‘삼바 공장 바닥 증거’로 불리며 검찰 수사의 주요 성과로 여겨진 증거들이다. 검찰은 이때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18TB 용량의 백업 서버를 비롯한 각종 자료를 핵심 증거로 재판부에 제출했다. 서버에 담긴 자료가 회계부정을 입증하는 동시에 증거은닉 혐의 증거라는 게 검찰 측 판단이다.하지만 재판부는 “정보저장매체 자체가 증거은닉 증거물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저장된 전자정보 일체가 증거은닉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서버 자체가 증거은닉 증거라 해도, 그 내부의 모든 전자정보를 선별 없이 압수해선 안 된다는 취지다. 검찰은 이 서버가 타인의 형사사건, 즉 삼성 불법 승계 혐의와 관련된 내용을 은닉한 증거라고 봤다. 그렇다면 서버에서 해당 혐의와 관련된 증거만 추려 압수했어야 하는데, 이런 절차가 없었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다.
재판부는 피의자와 변호인이 증거자료를 선별하는 과정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었던 점도 지적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검찰은 백업 서버 파일 778만 개를 압수한 후 이 중 임의로 고른 12개 폴더만 변호인에게 보여줬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검찰이 피압수자 측 참여를 완전히 배제한 채 아무런 선별 절차 없이 일방적으로 전자정보를 압수한 후 피압수자 측에 해당 전자정보를 제한적으로 열람할 기회만 준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검찰 측이 2020년 12월 22일 법원에 낸 의견서에서 “별도의 선별 절차 없이 서버 자체를 압수한 것”이라고 표현한 점도 증거에 대한 이렇다 할 선별 과정 없이 변호인에게 임의로 추린 12개 폴더를 보여준 근거라고 봤다.
재판부는 검찰의 증거 확보 과정이 압수수색 영장에 어긋난 점도 지적했다. 영장에 기재된 것처럼 혐의와 관련된 전자정보를 탐색·복제·출력한 후 지체 없이 압수한 전자정보 상세 목록을 교부하고, 해당 목록 외 전자정보는 삭제·폐기·반환해야 하는데, 검찰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삼성바이오에피스 NAS 서버
재판부는 검찰이 2019년 5월 3일 삼성바이오에피스 직원을 긴급 체포하면서 그 주거지 등에서 확보한 NAS 서버의 증거능력도 인정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검찰은 영장주의와 적벌절차의 원칙, 영장에 기재된 압수 대상 및 방법의 제한을 위반해 삼성바이오에피스 서버에 저장된 전자정보를 입수·취득한 것이므로 위법하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서버 관련 자료 목록에 ‘휴직복직 관리 기준’ ‘국내출장기준’ 등 혐의 사실과 관련 없는 자료가 다수 포함된 점을 지적했다. 검찰이 NAS 서버에 저장된 정보 가운데 실제 사건과 관련성 있는 것을 선별해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압수 증거 선별과 관련해 “검찰이 변호인이 참여한 가운데 선별 절차를 진행하다가 갑자기 중단하고, 전자정보를 선별 절차 없이 모두 압수한 뒤 저장매체 원본도 돌려주지 않겠다고 통보”(판결문 내용)한 점도 문제가 됐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압수수색 과정에 피압수자 측 참여권이 침해됐다고 판단했다.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검찰이 또 다른 핵심 증거로 제출한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도 압수수색 과정의 위법성을 이유로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가 본 검찰의 증거 수집상 문제는 각종 서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자정보 선별 절차가 없었고, 이에 대한 상세 목록을 피고 측에 전달하지 않았으며, 혐의와 관련 없는 정보를 삭제·폐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장 전 차장의 휴대전화 자체는 압수할 수 있는 증거로 봤으나, 검찰이 확보한 휴대전화 데이터 상당 부분이 수사와 무관하다고 판단했다. 가령 검찰이 피고 측 변호인에게 제공한 휴대전화 파일에는 가족 간 안부를 묻는 일상 문자메시지나 경조사, 심지어 광고 메시지까지 포함됐다. 검찰이 압수한 장 전 차장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 약 1만4000개 중 상당수가 혐의 사실과 무관하다는 게 재판부 측 판단이다. 또한 압수된 전자정보 상세 목록은 엑셀 파일 1개로 피고 측에 제공됐는데, 이 중 문자메시지의 경우 파일명만으로 구체적 내용을 확인할 수 없어 권리보호 절차가 침해된 점도 지적됐다.
각종 메일 기록도 ‘재전문진술’로 판단
재판부는 휴대전화 전자정보의 경우 검찰의 보관·저장 방법까지 특정해 문제점을 지적했다.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검찰은 이 사건 휴대전화에 저장돼 있던 전자정보를 대검찰청 D-NET 서버에 저장하는 방법으로 보관해왔고, 이를 로컬 PC에 엑셀 파일 형태로 저장한 후 이 사건 공판 과정에서 증거로 제출한 것으로 보이는바, 검찰은 이 사건 신체·차량용 영장에 기재된 혐의 사실과 무관한 전자정보를 삭제·폐기 또는 반환하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적시했다.재판부는 검찰이 APG자산운용 이사를 참고인 조사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진술 녹음 및 녹취기록에 대해서도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형사소송법 제221조 1항에 따라 작성한 영상녹화물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공소사실을 직접 증명하는 독립적 증거로 쓰일 수 없다는 법리와 대법원 판례에 따른 것이다. 검찰이 확보한 삼성 측 각종 내부 문건과 이메일 기록 상당 부분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형사소송법 제310조의2(전문증거와 증거능력의 제한)에 따른 ‘재전문진술’로 보고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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