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인 2013년 5월 당시 민주당 진선미 의원은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문서로 추정된다”며 2건의 서류를 공개한다. ‘서울시장의 좌편향 시정운영 실태 및 대응방향’과 ‘左派(좌파)의 등록금 주장 허구성 전파로 파상 공세 차단’이라는 제목이 달린 이들 문건의 작성일자는 각각 2011년 6월 1일과 11월 24일로 기록돼 있다. 국가기관과 민간단체를 동원해 박원순 서울시장 등 야권 특정 인사를 압박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 특히 등록금 관련 문건에는 당시 현직 국정원 직원들의 이름과 직책, 전화번호가 모두 기재돼 있었다.
민주당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문건에 이름이 기재돼 있는 직원들을 검찰에 고발하는 등 공세에 나섰지만, 국정원 측은 “우리 문건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수사를 담당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역시 “국정원 측으로부터 보고서 서식을 제출 받아 비교했지만 양식이 달라 공식문서로 보기 어렵다”며 고발을 각하한다. 사안이 불거진 뒤 다섯 달 남짓 만의 일이었다.
2년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 이들 문서가 새삼 주목받게 된 것은 대한민국어버이연합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사이 ‘수상한 자금 거래’가 폭로되면서. 특히 이 과정에서 청와대 행정관과 국정원의 개입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자 당시 문건의 일부 내용이 사실로 드러났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서울시장의 좌편향…’ 문건에는 ‘경총·전경련 등 경제단체를 통한 비난여론 조성’ ‘자유청년연합·어버이연합 등 범보수진영 대상 박 시장의 시정을 규탄하는 집회·항의방문 및 성명전 등에 적극 나서도록 독려’ 등의 문장이 포함돼 있다.
청와대 신임 배경으로 승승장구
이와 관련해 정통한 인사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2개 문건 중 ‘좌파의 등록금 주장…’ 문건에 작성주체 가운데 한 명으로 기재된 C모 당시 팀장이 현재 국정원 국내파트 국내보안국장(1급)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다. C국장은 2013년 초 박근혜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에 참여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으로 발령받았으나, 그해 5월 이들 문건이 공개되자 국정원으로 복귀한 뒤 2014년 8월 국정원 실·국장 인사에서 2차장 산하 국내파트의 수석간부인 현재 직책으로 승진했다.C국장이 이름이 적시된 ‘좌파의 등록금 주장…’ 문건의 작성자라면 야권을 상대로 하는 심리전을 기획한 인물이라는 의미이고, 작성자가 기재돼 있지 않은 ‘서울시장의 좌편향…’ 문건까지 작성했다면 전경련·어버이연합 등의 단체를 동원하거나 이들과 연계를 맺는 작업에 관여했다는 의미가 된다. 최근 논란과 관련해 사안의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주간동아’는 국정원 측에 “공식문서가 아니라면 C국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전혀 관여한 바 없는데 이름이 도용됐다는 뜻인지, 아니면 공식업무 이외 영역에서 작성한 문서라는 것인지 명확히 구분해달라”고 질의했다. 이에 대해 4월 28일 국정원 측은 “검찰 수사 결과 국정원 공식문서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 외에는 답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밝혀왔다.
최근 2년 사이 이른바 ‘C국장 문제’를 둘러싸고 청와대와 정보기관 주변에서 다양한 구설이 오갔음은 잘 알려진 사실. 2014년 8월 인사 당시 유력하다던 인물이 백지화되고 C국장이 승진임명되는 바람에 ‘청와대의 입김’이 회자된 게 첫 번째다. 지난해 가을에는 국장 승진 1년여 만에 다시 차관급인 기획조정실장으로 승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이병호 국정원장과 청와대 사이에 이를 둘러싼 갈등이 있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요컨대 인수위와 청와대 민정수석실을 거친 C국장이 청와대 핵심의 신임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게 주요 얼개다.
C국장이 맡고 있는 국내보안국장은 2차장 산하 국내파트가 취합하는 주요 정보가 경유하는 것으로 알려진 노른자위 직위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판도와 예상 결과를 청와대에 보고한 것 역시 이 부서라는 게 정통한 인사들의 설명.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국내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수차례 밝혀온 이병호 원장의 뜻과 충돌하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일례로 이번 총선 직전 국정원 측이 청와대에 보고한 판세 분석은 ‘새누리당 160석 내외, 더불어민주당 90석 내외’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선거 결과 자체가 워낙 누구도 예상 못 했을 만큼 충격적이긴 했지만, 어떻든 국가최고정보기관을 자임하는 국정원의 판단이 한계를 드러낸 셈. 이 때문에 청와대 일각에서는 “상황 분석이 부정확하면 뭘 믿고 정책을 입안하겠느냐”며 국정원 등 정보조직의 ‘무능력’을 지적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았다는 후문이다.
가장 민감한 바로미터
선거 분석이 크게 어긋난 것에 관해 거론되는 배경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난해 가을부터 회자되던 차장급 수뇌부 전면 인사가 넉 달 이상 지연되면서 조직 전체의 긴장이 느슨해졌다는 시각이다. 설 연휴이던 2월까지 인사가 미뤄지면서 지역 지부장 등 간부급 인사 역시 함께 늦춰졌고, ‘급물살을 타는 바닥 민심’을 살피는 촉수 노릇을 할 현장직원들도 ‘마음이 뜬 상태’였다는 것. 다른 하나는 “어떤 식으로든 선거와 관련된 행동을 하지 마라”는 이병호 원장의 반복된 엄명이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이다. 이 때문에 실제로 각 지역 현장직원들의 관련 활동 폭이 전례 없이 작았다는 설명도 뒤따른다.이렇게 놓고 보면 관련 업무를 총괄했던 C국장이 안팎으로 뜻하지 않은 난국을 맞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내정치 문제를 두고 청와대와 이병호 원장이 빚어온 시각 차이의 복판에 서 있는 데다, 승승장구의 배경이라던 청와대의 신임 역시 선거 판세 분석이 크게 어긋나면서 흔들리는 형국이기 때문. 여기에 이른바 ‘어버이연합 게이트’와 함께 2013년 문건이 다시 입길에 오르는 현재 상황은 사태의 향후 전개에 따라 파장이 어떻게 이어질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총선 참패로 위기에 처한 박근혜 정부로서는 이후 더욱더 정보기관에 의존하게 되리라는 게 정부 안팎의 한결같은 관측. 최근에는 박 대통령이 경제 관련 사안 역시 국정원으로부터 보고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올 정도다. 테러방지법 통과와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집단망명 등으로 국정원이 기세를 올리면서 이러한 경향은 한층 더 강해질 것으로 보이지만, 그에 비례해 국내 문제 관여를 둘러싼 청와대 핵심과 이병호 원장의 갈등 역시 함께 커지리라는 관측도 만만치 않다. C국장에 대한 일련의 쟁점은 이를 들여다볼 가장 민감한 바로미터인 셈이다.
[국정원에서 알려왔습니다]
'주간동아'는 지난 5월 4일자 정치면에 "'어버이게이트'로 드러난 '2013년 국정원 문건'의 실상"이라는 제목으로 국정원이 이번 총선 직전 청와대에 판세 분석을 보고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총선 결과와 관련하여 보고한 사실이 없고, 국내정치 관여 문제를 두고 청와대와 이병호 국정원장이 갈등을 빚었다는 내용도 사실무근"이라고 알려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