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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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악수’ 연발 한국기원은 표류 중

‘미투’ ‘인터넷 계약 파기’ 등 곳곳서 파열음…기사들, 중앙일보 출신 집행부에 반발

  • | 정용진 세계사이버기원 콘텐츠총괄이사·전 월간바둑 편집장 jsodol@daum.net

    입력2018-10-09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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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바둑계가 요동치고 있다. 1990년대부터 세계대회를 석권하며 최강을 자랑하던 한국 바둑이 2010년 이후 중국의 인해전술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참에 내부적으로 행정의 난맥상까지 겹치며 심각한 내홍 조짐을 보이고 있다. 

    10월 2일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린 한국기원 이사회. 이날 바둑계 미투와 관련해 프로기사 223명이 서명해 요청한 ‘윤리위원회 보고서의 재작성’에 대해선 찬성 10표, 반대 8표, 기권 3표로 과반수에 미달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아DB]

    10월 2일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린 한국기원 이사회. 이날 바둑계 미투와 관련해 프로기사 223명이 서명해 요청한 ‘윤리위원회 보고서의 재작성’에 대해선 찬성 10표, 반대 8표, 기권 3표로 과반수에 미달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아DB]

    4월 한 외국인 여성 바둑기사가 방송 바둑해설가로 유명한 김성룡 9단으로부터 9년 전 성폭행당했다고 주장한 ‘미투(Me Too)’가 시발점이었다. 한국기원 집행부는 진상 규명에 너무 오랜 시간을 끌어 비판을 받았다. 여기에 한국기원의 주요 구성원인 프로바둑기사들을 배제한 채 사무국이 일방적으로 일처리를 한다고 고발하는 글이 프로바둑기사 전용게시판에 올라왔다. 급기야 총재가 임명하는 한국기원 사무총장은 임명권자의 눈치나 볼 뿐 바둑계의 발전과 기사들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며 기사들이 직접 뽑자는 목소리까지 터져 나왔다. 9월 14일 프로바둑기사 223명은 김성룡 9단의 성폭행 의혹 사건에 대한 한국기원 윤리위원회(윤리위) 보고서에 왜곡이 많다며 재작성해달라고 요구하고 연대서명을 했다. 전체 기사 350명 중 64%가 집단행동에 나선 것은 바둑계 초유의 일이다. 

    이런 논란에도 한국기원 집행부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자 원로기사 노영하 9단이 나섰다. 그는 10월 1일 홍석현 한국기원 총재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형식으로 프로바둑기사 전용게시판에 작금의 바둑계 상황과 문제점을 짚었다. 원고지 80매가 넘는 이 글은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다. 노 9단은 시니어기사회장이자 한국기원 운영위원(상임이사)이고 KBS 바둑해설위원, 신문 관전기 해설자로도 유명해 상당한 파급력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원로기사 노영하 9단의 작심발언

    노 9단은 공개서한에서 ‘할 말은 해야겠다’며 말문을 연 뒤 최근 바둑계 상황에 대해 ‘기사로서 자존심은 크게 상처가 났고 기원은 바둑계의 신망을 잃은 채 갈 곳 없이 표류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총재사인 중앙일보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그는 바둑계가 이처럼 혼란에 빠져든 원인으로 홍석현 총재를 대리해 한국기원 사무국에 실질적으로 관여하는 송필호 부총재를 지목했다. 

    노 9단은 ‘송 부총재가 추진하는 여러 사업으로 인해 바둑계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송 부총재의 사업은 피를 부릅니다. 과격하고 일방적입니다. 균형적 발전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의 이득만을 생각합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2015년 한국기원이 바둑TV를 인수한 것과 최근 한국기원의 인터넷 사업을 대행하던 사이버오로와 계약 해지 등을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3년 전 한국기원은 당시 그룹 총수가 감옥에 가 있던 CJ E&M으로부터 바둑TV를 인수했다. 바둑 발전이라는 공익적 명분을 앞세워 200억 원 가치가 있다는 바둑TV를 80억 원에 넘겨받은 것이다. 올해 초에는 인터넷바둑 사이트 사이버오로의 대표를 해임하고 바둑TV 인사를 단독대표로 앉히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기전 중계권 계약 해지를 일방 통고했다. 사이버오로는 2000년 한국기원이 온라인바둑 보급을 위해 만든 자회사였고 여전히 한국기원이 1대 주주다. 자신이 최대주주인 회사가 중계를 못 하도록 막는 행위는 스스로 주식 가치를 떨어뜨리는 자해행위나 마찬가지다. 

    사이버오로를 설립할 때 한국기원은 기전 중계를 포함해 보유한 콘텐츠의 온라인 영업권을 자회사에 일임하는 조건으로 현금 한 푼 내지 않고 지분 66.7%를 확보했다. 이를 약조한 ‘원천정보제공계약’은 일방의 변심으로 파기할 수 없도록 쌍무협약으로 맺었다. 그러나 이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나섰고, 사이버오로 측은 손해배상 등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한국기원서 바둑TV 분리가 ‘큰 그림’?

    한국기원 상임이사이자 시니어기사회장인 노영하 9단은 최근 홍석현 한국기원 총재에게 보내는 서한을 공개해 기원 행정의 난맥상을 비판했다. [동아DB]

    한국기원 상임이사이자 시니어기사회장인 노영하 9단은 최근 홍석현 한국기원 총재에게 보내는 서한을 공개해 기원 행정의 난맥상을 비판했다. [동아DB]

    바둑계에서는 이 모든 사태의 근원에 송필호 부총재가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빅픽처’(큰그림)가 자리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돈다. 그는 바둑방송(바둑TV와 K바둑)과 인터넷바둑 사이트(사이버오로)를 하나로 합쳐 ‘규모의 경제’를 실행하겠다는 생각을 프로바둑기사 대의원들과 면담에서 밝힌 바 있다. 그 자리에 있었던 한 기사는 “뚜렷한 비전이나 수익창출 모델 같은 구체적인 로드맵 없이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견해를 얘기할 뿐이었다. 결국 노른자위인 바둑TV를 중심으로 통합회사를 만든 다음 한국기원에서 별도 법인으로 분리할 계획인 것 같았다”고 전했다. 노 9단도 “공익성 강화를 위해서는 한국기원이 직접 운영해야 한다며 CJ E&M으로부터 바둑TV를 가져오고, 이후 사이버오로와 K바둑을 상대로 갑질에 가까운 횡포를 부리더니, 이제 와 분리하려 한다는 얘기가 들린다. 중앙일보가 한국 바둑계의 알짜 사업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풍문이 오래전부터 떠돌았는데 사실이 아니길 바랄 뿐”이라며 우려의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한국기원 이사이자 운영위원인 한종진 9단 또한 프로바둑기사 전용게시판과 홍석현 총재가 주재한 임시이사회에서 한국기원 집행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 절차적 하자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 9단은 한국기원 집행부가 추진 중인 대규모 프로젝트가 운영위원회나 이사회에서 다뤄지지 않은 채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정관에 정한 의결 절차를 위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기원은 인터넷바둑 사이트(사이버오로)를 버리고 별개의 정보기술(IT) 사업에 착수했으며, 7개월 동안 이미 수억 원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사이버오로가 문을 닫을 경우 한국기원은 보유한 주식의 가치만 대략 20억 원을 호가하니 신설 사업에 드는 돈과 안팎계산으로 따지면 큰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홍 총재 취임 이후 중앙일보 인맥들이 한국기원 사무국 요직을 차지하면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근로기준법 위반과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부당 해고 및 인권침해 사례 등에 대해서도 내부적으로 집행부 고발 움직임이 일고 있어 이래저래 시끄럽게 생겼다. 한 여성 바둑기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홍석현은 한국기원에서 물러나라’는 손팻말을 들고 찍은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 여성 기사는 송 부총재가 주재하는 한국기원 운영위원회에서 징계 논의 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바둑계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한국기원을 ‘중앙기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끝나지 않은 ‘바둑계 미투’

    미투 폭로에 휘말린 김성룡 9단(위)과 한국기원 윤리위원회 조사보고서. [동아DB]

    미투 폭로에 휘말린 김성룡 9단(위)과 한국기원 윤리위원회 조사보고서. [동아DB]

    헝가리 출신의 여성 바둑기사 디아너 쾨세기 초단은 9년 전 선배기사인 김성룡 9단의 집에 놀러갔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주장을 4월 16일 프로바둑기사 전용게시판에 게재했다. 기전 우승 경력이 있는 김 9단은 프로야구해설가였던 고(故) 하일성 씨처럼 걸쭉한 입담으로 인기가 좋았던 바둑해설가이자 바둑리그 감독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한 유명 기사였다. 더군다나 한국기원 홍보이사였기에 충격파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순식간에 인터넷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점령하는 등 알파고-이세돌의 대결 이후 바둑계가 이처럼 전국적인 관심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한국기원으로선 뼈아픈 노릇이지만, 소속 기사 수백 명의 개인적 일탈행위를 어떻게 일일이 관리·감독할 수 있겠는가.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이 중요했다. 그런데 한국기원 집행부는 미온적 대처로 일관했다는 것이 바둑계의 중론이다. 

    먼저 유사한 사례 하나를 보자. 비슷한 시기 한국 프로야구 넥센 히어로즈 선수 2명이 만취한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가 제기됐을 때 한국야구위원회(KBO)와 해당 구단이 취한 조치는 한국기원의 늑장 대처와 대비됐다. 구단은 피해자의 고소로 경찰이 수사에 들어간 시점도 아닌, 112로 신고가 접수된 상황에서 성폭행 사건이 보도된 당일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두 선수를 출전 정지시켰고, 이후 1군 엔트리에서 말소했다. KBO 사무국 또한 총재의 직권명령권을 내세워 이들의 활동을 정지시키면서 유감을 표명했다. 

    김성룡 9단은 한국기원이 법인카드를 발급한 홍보이사였다. 그런데도 한동안 한국기원은 홍보이사 또는 바둑리그 감독직을 해임하기는커녕 기사 자격 임시정지 등과 같이 즉각 취할 수 있는 권한조차 발동하지 않았다. 여태까지 집행부는 도의적으로라도 유감 표명이나 성명서 한 줄 발표하지 않고 있다.

    프로기사 223명 ‘보고서 재작성’ 요구

    한국기원은 사건 조사를 위한 윤리위를 구성했다. 윤리위는 한 달 반가량 양쪽을 조사한 후 보고서를 작성했다. 한국기원은 이 보고서를 토대로 7월 10일 징계위원회를 열어 김성룡 9단의 프로바둑기사직 제명을 결정했다. 그런데 공개되지 않았던 ‘윤리위원회 조사보고서’가 유출되면서 다시 파문이 일었다. 윤리위의 종합 의견은 ‘두 당사자의 진술을 종합적으로 볼 때 김성룡 9단의 진술이 디아너 초단의 진술보다 일관성과 신빙성이 조금 더 높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본인 진술만 있는 김 9단의 주장에 비해 디아너 초단은 여러 명의 증인과 성폭행을 당한 직후 헝가리에 사는 오빠에게 보낸 9년 전 e메일 등을 증거로 제출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또 조사 과정에서 2차 피해를 겪었다는 주장도 흘러나왔다. 

    한국기원의 대응에 실망한 바둑 팬들은 페이스북에 ‘디아너 사범님과 함께하는 사람들(With you, Master Diana)’을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고 가입 자가 회원이 5000여 명에 이른다. 프로바둑기사들도 호응해 ‘기존 윤리위원회 조사보고서 폐기와 공정한 재조사’를 요구하는 연대서명에 나섰으며, 여기엔 이창호 9단과 현재 국내 랭킹 1위인 박정환 9단도 동참했다. 그렇지만 10월 2일 열린 한국기원 임시이사회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다 끝난 일이므로 다시 거론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별도의 입장 표명은 없었다. “김성룡보다 정작 바둑 이미지를 더 실추케 한 건 한국기원 집행부”라는 비난을 듣고 있는 마당에 향후 만만치 않은 후폭풍이 예상된다. 

    2014년 홍석현 총재 취임 이후 4년 만에 한국 바둑계는 혼란과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다. 바둑계는 기사들의 선후배 서열이 지엄하고 다른 분야에 비해 변화와 혁신이 더딘 보수적인 동네라는 평판을 듣는데, 이런 목소리가 활화산같이 분출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한국 바둑계는 1975년 3월 한국기원과 대한기원으로 갈려 반목한 아픈 역사가 있다. 소외된 프로바둑기사들이 한국기원 집행부의 전횡에 반기를 들고 자기 권리를 찾고자 봉기한 이른바 ‘기사파동’으로 부르는 사건이다. 지금 한국 바둑계는 기사파동 이래 최악의 국면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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