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공찬전 국문본이 적힌 ‘묵재일기’ 제3책 표지(왼쪽)와 본문. [사진 제공 · 이복규 서경대 교수]
젊은 시절 명문장가로 꼽혔으나 실제 삶은 사대부가 마땅히 꿈꿔야 하는 도학자의 그것과 담쌓은 것이었다. 서른에 황해도 도사(감영에서 감사에 이은 넘버2)로 부임하면서 한양에서 기생과 무뢰배를 끌고 갔다는 이유로 여섯 달 만에 파직됐다. 또 수안군수와 삼척부사로 있을 때는 대놓고 불교를 신봉한다고 해 파직됐다. 20여 년 관직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중도 파직된 게 여섯 차례나 된다. 1610년엔 ‘이화우 흩뿌릴 제’ 하는 시조로 유명한 기생 매창이 죽자 추모 시를 지어 사대부의 눈총을 한 몸에 받았다.
그렇게 제멋에 겨워 자유분방하게 살던 그는 1613년 ‘칠서지옥’(七庶之獄·계축옥사)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다. 자신을 따르던 명문가 서얼 일곱 명이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이 대형 정치 사건으로 비화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이 강화도에 유배된다. 교산은 당시 실권자이던 대북파의 이이첨에게 접근해 목숨을 구한 대신, 대북파의 행동대장으로 변신한다. 1617년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들고 나온 것. 이로 인해 다른 당파의 미움을 사 결국 그 자신이 역모사건에 연루돼 조사를 받다 49세에 능지처참됐다.
현존 ‘홍길동전’은 19세기 중반 필사본
‘설공찬전의 이해’ 표지.
실제 홍길동전 필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1850년대를 넘지 못한다. 그 판본에는 허균이 죽고 난 후 출현한 광대 출신의 도적 장길산이 거명된다. 이 때문에 홍길동전은 허균의 작품이 아니거나, 허균이 지었다 해도 한문으로 쓴 것을 후세 한글로 번역하면서 가감이 이뤄졌을 개연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엇보다 홍길동전보다 100년가량 앞서 한글로 기록된 소설이 있다. 이복규 교수는 1996년 성주이씨 가문이 소장한 묵재 이문건(1494~1567)의 ‘묵재일기’를 탈초(초서로 쓴 한자를 정자로 바꾸는 작업)하다 제3책(1545~1546년의 일기)의 이면에서 한글로 된 13장 분량의 ‘설공찬전’을 발견했다.
설공찬전은 중종 때 문인 채수(蔡壽·1449~1515)가 쓴 한문소설로 ‘조선왕조실록’ 중종 6년(1511) 기사에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유일한 국내소설이다. 그 전반부만 발견된 한글본 내용에 따르면 전북 순창 설씨 가문의 촉망받는 수재였지만 20대에 요절한 설공찬의 혼령이 사촌동생 설공침의 몸에 빙의해 저승세계에 대해 들려주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혹세무민한다는 이유로 원문이 모두 불태워지고 필자 채수는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는 비난 끝에 파직되는 필화 사건을 몰고 왔다.
1511년 중종실록에 나온 한글소설의 출현
허균 초상화. [동아DB]
채수는 군신관계를 부모자식 관계로 봤기에 중종반정의 대의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래서 관직제수를 받는 것도 꺼렸다. 이를 눈치 챈 중종의 신료들이 설공찬전의 내용 중 중국 당나라 장수로서 당을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한 주전충이 지옥에 있다는 대목이 중종반정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라 여겨 맹공했을 개연성이 크다.
어쨌든 문제의 소설이 모두 불태워졌는데, 그 일부가 한글판본으로 발견된 것이다. 국문학계에서 이를 검토한 결과 표기법상 17세기 후반의 것으로 밝혀졌다. 한글로 기록된 현존 소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게다가 실록에는 한문본이 워낙 인기가 많아 그 당시 이미 국문본이 만들어져 널리 읽히고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따라서 설공찬전은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소설임에 틀림없다. 최초 한문소설로 꼽히는 김시습의 ‘금오신화’(1465년 전후)는 한문 필사본으로만 전해졌다. 심지어 목판본은 일본에서 발간됐을 정도다.
학계에선 설공찬전이 처음부터 한글로 지은 소설이 아니라는 점에서 여전히 홍길동전을 최초 한글소설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그 실체가 19세기 중반에 등장하는 데다 허균이 지었다는 직접적 증거가 부족하다. 설령 허균이 지었다 해도 설공찬전처럼 한문으로 쓴 것이 후대에 한글로 번역했을 개연성이 크다.
이복규 교수는 올해 출간된 ‘설공찬전의 이해’에서 ‘이석단(李石端)’과 ‘취취(翠翠)’ ‘오륜전전(五倫全傳)’처럼 처음부터 한글로 쓰인 최초의 소설 작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1531년 낙산거사가 한문으로 쓴 ‘오륜전전’의 서문을 보면 당시 한글본으로 읽히던 소설로 ‘이석단’ ‘취취’ ‘오륜전전’이 있는데, 앞의 두 작품은 허랑방탕한 반면 오륜전전은 교훈적이라 한문으로 윤문·각색해 남긴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문으로 기록된 오륜전전의 내용은 전국시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산 오륜비-륜전 형제의 이야기를 극화한 중국 희곡 ‘오륜전비기’와 유사하다. 하지만 이석단과 취취는 그 내용조차 모른다. 중요한 것은 세종대왕의 한글창제(1443) 이후 허균이 졸한 1618년 사이 170여 년 동안 한글소설이 없었을 것이라는 발상을 이제는 바꿀 때가 됐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