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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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구의 지식 블랙박스

지루함을 견디는 시간에서 새로움이 탄생한다

혁명은 ‘지루함 ’에서 시작된다

  • | 지식큐레이터 imtyio@gmail.com

    입력2018-10-09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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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읽기 전 책상을 비롯한 자신의 작업 공간을 한번 둘러보라.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인, 정리 · 정돈이 잘된 상태인가. 아니면 온갖 잡동사니가 여기저기 쌓인 채 무질서하게 놓여 있는 상태인가. 고백하자면, 이 글을 쓰는 나는 후자다. 방 구석구석에 책이 잔뜩 쌓여 있을 뿐 아니라, 책상에도 온갖 책과 출처조차 헷갈리는 서류 뭉치들이 놓여 있다. 

    누구나 무질서하고 지저분한 방보다 정리 · 정돈이 잘된 깨끗한 방을 원한다. 그런데 무질서하고 지저분한 방이 뜻밖에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2013년 미국 미네소타대 심리학자들이 엉뚱한 실험으로 밝혀낸 사실이다. 이들은 실험에 참가할 사람을 모은 다음 깨끗한 방과 더러운 방으로 나눴다. 이들은 각각 깨끗한 방과 더러운 방에서 몇 가지 과제를 수행해야 했다. 이런 과제였다. ‘탁구공을 제조하는 회사가 사업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탁구공을 전혀 다른 새로운 용도로 쓸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모으는 중이다. 탁구공으로 탁구가 아닌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을까.’

    창의력을 북돋는 지루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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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은 이런 과제도 던졌다. ‘동네의 레스토랑에서 새로운 음료 메뉴를 개발 중이다. 애초의 음료와 새로운 음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나은가.’ 실험 결과는 흥미로웠다. 음료 메뉴를 놓고 보면 깨끗한 방에서 과제에 답한 사람은 애초의 음료를 선택했지만, 더러운 방에서 답한 사람은 새로운 음료에 호감을 보였다. 

    탁구공의 사정은 어땠을까. 더러운 방에 있던 사람은 창의성 면에서 깨끗한 방에 있던 사람의 답을 압도했다. 더러운 방에서 나온 아이디어 가운데 창의성 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에는 탁구공을 반으로 잘라 얼음을 얼리는 용기로 사용하자는 안도 있었다. 반면 깨끗한 방에서는 탁구공의 틀을 깨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다. 

    이 실험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리 · 정돈이 잘된 깨끗한 방은 통념에 기반을 둔 사고방식을 강화하고, 무질서하면서 지저분한 방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창의적인 사고방식을 자극하는 효과를 낳은 것은 아닐까. 그러니 아이가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더라도 꾸짖지 말자. 어쩌면 세계를 바꿀 대단한 창의력이 발휘되는 순간일 수도 있으니까. 



    비슷한 맥락의 실험이 또 있다. 2012년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타바버라 캠퍼스의 심리학자가 발표한 연구 결과다. 이들도 처음에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벽돌처럼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물건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물었다. 그런 다음 이들에게 간단한 컴퓨터 게임을 시켰다. 

    한 그룹에는 모니터에 검은색 숫자가 계속해서 나오는 가운데 빨간색이나 녹색의 짝수가 나오면 “예!”라고 외치게 했다. 빨간색이나 녹색의 짝수는 일부러 드물게 나오도록 조정했다. 그러니 이 그룹은 모니터에 나오는 검은색 숫자만 멍하니 쳐다보면서 지루함을 견디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했다. 

    반면 다른 그룹의 게임은 난도가 높았다. 이들은 빨간색이나 녹색 숫자가 나오기 전 검은색 숫자가 짝수였는지 홀수였는지를 파악해야 했다. 멍하니 숫자만 바라봐서는 해낼 수 없는 과제였다. 이 그룹은 계속해서 숫자의 변화를 예의주시하며 기억하느라 상당한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다. 이 게임이 끝나고 실험 참가자에게 다시 주문했다. ‘벽돌을 애초 집을 짓거나 물건을 누르는 것 이외에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할 방법이 있을까.’ 결과는 어땠을까. 짐작대로다.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던 게임 그룹보다 지루함의 끝을 경험한 그룹이 훨씬 더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이런 실험 결과는 ‘지루함’을 둘러싼 여러 생각을 자극한다. 혹시 무엇이 사람을 지루하게 만드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더 나아가 왜 사람은 지루함을 느낄까. 아마도 대다수는 이런 질문을 이 자리에서 처음 접해봤으리라. 그럴 만하다. 세상의 모든 일이 ‘재미’로 판단되는 현 세태에서는 지루함 따위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으니까. 

    과학계 사정도 마찬가지다. 지루함은 공포, 흥분, 재미처럼 모든 사람이 느끼는 아주 평범한 감정임에도 지금까지 과학자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지루함의 실체를 파고드는 연구 자체가 적었다. 앞에서 언급한 연구를 비롯한 몇몇 시도가 지루함의 효과가 무엇인지 단편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최근 연구들은 지루함이 쓸모없는 감정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미 확인했듯이 지루함은 사고방식을 유연하게 만들어 통념을 벗어나는 창의력을 북돋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는 강박적으로 그것에 매달리기보다 긴장을 풀고 지루한 시간에 몸을 맡기는 여유가 필요하다. 사과나무 밑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고안한 뉴턴을 기억하라!

    지루함, 현 상황에 변화 필요하다는 신호

    더 나아가 지루함은 현 상황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중요한 신호를 준다. 지루함이 역설적으로 변화나 도전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약 10만 년 전 아프리카 초원에서 지루한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어떤 동물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결단을 내렸다. ‘매일매일 똑같은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보자.’ 

    맞다. 그들은 바로 현생 인류의 조상이다. 그들은 서남아시아를 거쳐 전 세계로 뻗어나갔고 곳곳에 정착했다. 비로소 인류가 지구의 지배자가 됐다. 지루함이 없다면 변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어느 순간 지루함이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면 심각하게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재미’만 좇는 우리의 모습은 상당히 우려스럽다. 드라마, 영화, 웹툰, 관음증을 부추기는 소셜미디어와 그것과 점점 비슷해지는 뉴스를 소비하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 그때그때 재미있는 오락거리로 지루함을 회피하면 변화를 시작해야 할 순간, 즉 도전의 시간을 놓칠 가능성이 크다. 지루함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재미있는 일만 존재할 수는 없다. 꼭 필요한 지루함의 순간을 감내해야 삶이 더 역동적이게 된다. 안다. 지루함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당장 이 글을 마무리하는 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걱정도 이런 것이니까. ‘혹시 이 글이 지루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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