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은 한국미술사에 길이 남을 두 권의 책이 출간된 해로 기록될 것이다. 하나는 조선 문인화(文人畵)의 정수를 다룬 박희병(62)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의 책이요, 다른 하나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2000년 화원화(畵員畵) 전통의 완결로서 조선 민화를 새롭게 조명한 강우방(77)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원장의 책이다.
두 책은 모름지기 진정한 미술사란 사상사와 함께 가야 함을 여실히 증명하며 방대한 분량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전자는 18세기 최고 문인화가 이인상(李麟祥·1710~1760)의 그림 64점과 글씨 131점을 각 1권씩 분석한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돌베개)으로 두 권을 합쳐 2302쪽에 이른다. 후자는 호작도, 농기, 책거리, 문자도 등 19세기 조선 민화에 고대로부터 계승된 영기화생(靈氣化生)의 원리가 어떻게 적용됐는지를 분석한 ‘민화’(다빈치)로 543쪽 분량이지만 판형이 훨씬 큰 데다 도판 수만 450여 점에 이른다.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부터 보자. 박희병 교수는 그동안 사상사를 간과해오던 한국미술사학계에 죽비를 내리치며 문·사·철이 어우러진 미술사를 선보였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20년 세월을 바쳤다. 1998년 이인상 문집인 ‘능호집’을 번역하기 시작해 3년 뒤 마쳤다. 그래도 풀지 못한 의문점들은 2005년 이인상 후손이 소장한 능호집 초고를 집대성해놓은 ‘뇌상관고’를 발견하며 상당수 해소할 수 있었다.
이후 10여 년간 이인상의 서화를 직접 완상하고 그 제문을 해독했다. 그 과정에서 그림은 ‘수루오어도’와 ‘영지도’ 2점을 새로 찾아냈고 글씨는 100점가량을 새로 발굴해 131점까지 확대했다.
이를 바탕으로 3년에 걸쳐 초고를 작성했고, 다시 그것을 보완하는 데 3년이 걸렸다. 이인상과 주변 인물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이인상 개인의 내면세계를 읽어가며 작품 하나하나가 언제 왜 어떻게 완성됐는지를 치밀하게 고증했다. 서예가인 부친(박성열)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서예를 익혀온 데다 조선 한문학의 최고봉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작품을 통해 갈고닦은 한문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이인상의 호로도 쓰인 옥호 능호관(凌壺觀)과 뇌상관(雷象觀)의 위치다. 이는 이인상 서화에 자주 등장하는 남간(南間), 종강(鍾岡)의 위치와 연결된다. 기존 미술사가들은 남간을 경기 남양주시 일대 야산으로, 이인상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은둔한 종강을 경기 이천시 장호원으로 비정했다.
하지만 박 교수는 남간은 서울 남산 계곡을 말하며 종강은 서울 명동 북고개를 뜻하는 종현임을 규명했다. 이인상은 1741년 무렵 남산 고지대에 친구가 지어놓은 초옥 세 칸에 입주해 살게 되는데 이 집 이름이 능호관이었다. 그러다 1753년 음죽현감을 그만두고 명동 종강에 초가집 두 채를 새로 지어 죽을 때까지 살았으니 그 옥호가 뇌상관이었다.
박 교수가 포착한 이인상은 아나크로니스트였다. 시대착오적 존재라는 말이다. 노론 벽파 가문 출신으로 숭명배청(崇明背淸) 사상에 충실했기에 명의 패망 이후 철저한 유민(遺民)의식에 젖어 살았다. 그래서 중화문명의 뿌리를 찾아 상고시대 서체인 전서와 예서에 심취했고, 원말 화가 예찬(倪瓚·1301~1374)의 쓸쓸하면서도 기품 넘치는 화법을 흠모했다. 하지만 서얼 출신이라 미관말직을 전전하다 음죽현감을 끝으로 재야로 돌아가 7년 만에 숨을 거뒀다.
조선의 돈키호테
이인상의 ‘송변청폭도’(위)와 ‘장백산도’. [사진 제공 · 돌베개]
이를 강렬히 보여주는 그림이 ‘송변청폭도(松邊廳瀑圖)’와 ‘장백산도(長白山圖)’라는 것이 박 교수의 분석이다. 두 그림을 이해하려면 ‘단호그룹’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단호(丹壺)란 이윤영(1714~1759)의 호 단릉(丹陵)과 이인상의 호 능호관에서 한 자씩 따와 조합한 말로, 시문과 서화에 일가견이 있던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한양에 살던 문인들의 대명사였다.
단호그룹의 핵심 인사였던 오찬(1717~1751)의 죽음은 이인상에게 필생의 트라우마를 안겨준다. 서른네 살에 장원급제한 오찬은 출사하자마자 영조의 역린을 건드려 함남 삼수로 귀양 갔다 몇 개월 만에 병사한다. 영조가 신료들에게 언급을 금한 신임사화(경종 때 집권한 소론이 노론을 숙청한 사건)의 시시비비를 가릴 것과 왕실자금을 관리하는 내수사 폐지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순진한 것이요, 나쁘게 말하면 눈치가 젬병이라 빚어진 비극이었다.
오찬을 자신과 동일시하던 이인상은 이 사건으로 받은 상실감과 충격으로 결국 관직에서 물러나는 한편, 권력에 대한 저항의식과 인생에 대한 초탈의식이 강화된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가운데 각지고 돌출된 바위 사이로 길게 휜 소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선비를 그린 송변청폭도는 권력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의 산물이라는 것이 박 교수의 설명이다.
그림 좌측에는 조선 최고 천재시인으로 꼽히지만 연산군에게 직언하다 스물여섯 나이에 처형된 문인 박은의 시 구절이 인용돼 있다. ‘성난 폭포는 홀연 하늘 밖에 울리고/뜬구름은 해가에 그늘을 만들려 하네.’ 젊은 날 임금에게 직언하다 죽은 오찬과 박은을 동일시하면서 그 직언을 성난 폭포로, 또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임금의 아둔함을 해가에 그늘을 만드는 뜬구름으로 포착했다는 것이다.
장백산도는 화폭을 가득 채운 강물이 원경의 장백산(백두산)을 휘감은 풍경을 상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인상은 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백두산의 그림을 그렸을까. 백두산 기슭 삼수에서 절명한 오찬을 떠올리며 인생만사에 대한 강렬한 허무의 감정을 화폭에 담아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박 교수의 설명이다.
연암 · 추사도 상찬한 문인화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반한 책거리 병풍화. [사진 제공 · 강우방]
“몽당붓과 담묵(淡墨)으로 뼈만 그리고 살은 그리지 않았으며 색택(色澤·빛깔과 광택)을 베풀지 않았거늘, 감히 게을러서가 아니라 심회(心會·마음으로 깨닫는 것)가 중요해서다”라는 ‘구룡연도(九龍淵圖)’의 발문이 이를 대변한다. 박 교수는 그 미의식을 이렇게 요약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번(繁)이 아니라 간(簡), 공(工)이 아니라 졸(卒), 밀(密)이 아니라 소(疏), 농(濃)이나 숙(孰)이 아니라 담(淡)과 생(生)을 통해 구현된다.’
추사 역시 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졸미를 강조했다. 그럼에도 박 교수는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둘을 이렇게 비교했다.
“추사는 자신이 명필이라는 자의식을 자주 표출했지만 이인상은 글씨를 잘 쓴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표출한 적이 없어요. 그런 의식을 버려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었으니 무아지경의 예술이 따로 없었던 셈입니다. 동아시아 전체를 조망할 때 한국을 대표할 진정 독창적 예술가는 김정희가 아니라 이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 교수는 추사나 ‘시서화 삼절’로 불린 자하 신위(1769~1847)를 명사(名士)라 한다면 이인상이야말로 전통시대 최고 선비로 봤던 고사(高士)에 가깝다고 봤다. 고사는 단순히 문필에 뛰어난 것을 넘어서 사상가로서, 인격자로서 무게를 겸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문학, 역사, 사상, 예술을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통합인문학 및 한국학의 연구대상으로서 적격”이라고 설명했다.
강우방 원장의 ‘민화’는 일본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가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경탄한 19세기 조선민화의 미스터리를 풀어냈다. 첫째, 그가 고구려벽화를 분석하면서 발견한 ‘영기화생(靈氣化生)의 원리’가 민화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음을 채색분석을 통해 입증했다.
민화의 재발견
삼성미물관 리움 소장 ‘까치호랑이’. [사진 제공 · 강우방]
이는 우리의 통념과 많이 다르다. 민화 하면 아마추어 민중 예술가들이 어설프게 그린 그림이라 격조나 완성도가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 원장은 신라의 채전(彩典)→통일신라의 전채서(典彩署)→고려의 도화원(圖畵院)→조선의 도화서(圖畵署)로 계승된 영기화생의 원리를 연마한 화원들이 상업발달과 함께 국가가 아닌 민간에 고용돼 자유롭고 창의적 작품으로 민화를 그렸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삼국시대부터 화원 제도를 통해 연면히 이어져 내려온 조형예술의 전통적 표현 원리가 세기말 화원의 자유로운 붓끝에서 폭발했다는 것을 극적으로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표현 양식으로 그린 민화가 우리나라 2000년 회회사의 마지막 금자탑임을 알고 흔희작약했습니다.”
호랑이와 까치가 함께 등장한다고 해 ‘호작도(虎鵲圖)’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민화를 보자. 등잔불처럼 큰 눈과 이마의 큰 반점, 태극이 뭉친 듯한 꼬리와 관절에서 고구려벽화 속 사신도 중 백호(白虎)를 형상화할 때 적용한 영기화생의 원리가 발견된다. 사납게 포효하는 듯하지만 관음보살의 대자대비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역설의 미학이 가미됐다. 엄숙한 화원의 전통에 민중의 해학적 전통이 더해진 결과다.
농사일을 하면서 풍악을 울릴 때 세우는 농기(農旗)의 그림 속 용과 물고기, 농사의 신 신농씨에서도 영기화생의 원리가 고스란히 발견된다. 강 원장은 1933년 그려진 농업박물관 소장 ‘강진 용소농기’ 그림에서 용이 여의주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여의주가 용에서 분출한다는 것과 신농씨의 지물(持物·신령스러운 존재가 등장할 때 함께 등장하는 상징물)인 살포(물꼬를 틀 때 쓰는 농기구)가 임금이 고령의 신하에게 치사하며 내리는 궤장(의자와 지팡이) 중에 지팡이의 원형임을 발견한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처음 보고 홀딱 반했다는 병풍 속 책거리에 대한 분석도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책거리란 선반의 책과 기물을 그린 중국 책가도를 한국적으로 변용해 만병과 보주의 원리를 자유롭게 표현한 민화로 봐야 한다는 것이 강 원장의 설명이다. 실제 책거리를 보면 다양한 기물에서 영롱한 영기무늬가 발견되며, 책을 넣어두는 책갑의 여러 면이 마치 입체파의 그림처럼 한 화폭에 동시에 담기는 경우도 보인다. 야나기가 ‘불가사의한 샘’이라고 부른 책거리 병풍화는 만병에서 만물이 생성되고 진리를 기록한 서책에서 무량보주가 발산하는 영기화생의 원리가 작동한 그림임이 드러난다. 강우방은 그렇게 야냐기가 던진 수수께끼 같은 질문의 답을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