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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간극은 독일에서 그들의 삶과 예술을 기록한 대표작의 발표 연도만큼 크다. 영혼의 자유를 갈망하며 뮌헨 골목을 떠돌던 전혜린은 31세까지 홀로 살다 요절한 ‘영원한 청춘의 아이콘’이었다. 반면 김영희는 열네 살 연하의 독일인 남편을 따라 뮌헨으로 가 전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아이 셋과 독일인 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아이 둘, 도합 다섯을 기른 모성애의 화신이었다.
10월 3일 밤 독일에서 허수경 시인이 위암으로 향년 54세에 별세했다는 부고장이 날아들었을 때 마치 전혜린과 김영희 사이를 가로지르는 별똥별을 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경남 진주 출신으로 1987년 문학계간지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허수경의 시세계는 전혜린의 당찬 도발성과 김영희의 웅숭깊은 모성애가 교차한다.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1988)에 실린 ‘폐병쟁이 내 사내’의 다음 시구가 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산가시내 되어 독 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 밑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허수경은 그렇게 토착적 몸의 언어와 외롭고 쓸쓸한 도회적 감수성이 교차하는 시로 수많은 문청을 잠 못 들게 해놓고선 1992년 돌연 독일로 떠났다. 오랜 세월 병 수발을 들던 부친이 숨진 뒤 밀려드는 허탈감을 달래기 위해 불쑥 떠났다는 게 시인의 변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고고학에 심취해 박사학위까지 받더니 독일인 남편과 결혼해 눌러앉았다.
‘1990년대의 전혜린’은 그렇게 ‘2000년대의 김영희’로 안착하나 싶었다. 그러나 가끔 엽서를 부치듯 발표한 시집에서 진한 모국어로 꾹꾹 눌러쓴 시들은 또다시 이 땅 문청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래서 창작의 거름이 될 슬픔을 거두려고 영원한 이방인으로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캐나다로 건너가 그 누구보다 질퍽한 모국어의 향연을 펼치던 소설가 박상륭처럼.
그래서 그의 시 ‘공터의 사랑’이 더욱 사무치게 다가선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
※졸기(卒記) : 졸기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를 뜻하는 말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당대 주요 인물이 숨지면 졸기를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