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와 타자 양쪽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미국 메이저리그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 [동아DB]
포수 겸 7번 타자로 경기를 시작한 아르시아는 팀이 2-18로 뒤진 7회 말 일곱 번째 에인절스 투수로 마운드를 밟았습니다. 아르시아는 첫 두 타자는 범타로 돌려세웠지만 9번 타자 조시 페글리(30)에게 안타를 내줬고 닉 마티니(28)와 채드 핀더(26)에게 연속 타자 홈런을 맞았습니다. 다음 타자 프랭클린 바레토(22)를 중견수 뜬공으로 돌려세우며 투구를 끝낸 아르시아는 8회에도 마운드에 올랐고 이번에는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9회에 홈런을 친 겁니다.
아르시아가 메이저리그 경기에 투수로 등판한 건 이번이 두 번째. 아르시아는 팀이 0-7로 패한 9월 12일 안방 경기 때도 역시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를 상대로 9회 초 마운드에 올라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은 적이 있습니다. 단, 이때는 경기에서 빠져 있다 곧바로 마운드에 올랐기 때문에 투수와 포수로 동시에 출전한 건 아닙니다.
메이저리그 통계 사이트 베이스볼 레퍼런스에서 출전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1908년 이후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한 선수가 투수와 포수로 출전한 건 9월 20일 아르시아가 24번째 사례였습니다. 이 가운데 12번이 2008년 이후 나왔고, 그중 8번은 지난해와 올해의 기록입니다.
포수가 마운드에 오르는 경우만 늘어난 게 아닙니다. 지난해 원래 야수였던 선수가 투수로 출전한 건 총 36번이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1946) 이후 최다 기록이었습니다. 올해 이 숫자는 74번으로 2배 넘게 늘었습니다. 투수와 타자를 겸하는 ‘니도류(二刀流)’ 오타니 쇼헤이(大谷翔平·24·LA 에인절스)가 마운드에 오른 10번을 빼도 64번입니다. 바야흐로 ‘야수 등판’ 전성시대가 막을 올린 겁니다.
‘야수’ 투수 성적은 글쎄…
예상하는 것처럼 야수가 남긴 투구 기록은 별 볼 일 없습니다. 오타니를 제외하면 48명이 62이닝을 던져 무승 2패, 평균자책점 11.32에 그쳤습니다. 이들을 상대한 타자는 타율 0.346, OPS(출루율+장타력) 1.142로 최우수선수(MVP)급 기록을 남겼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메이저리그 감독들이 자꾸 야수를 마운드에 세우는 이유는 뭘까요.구원투수가 그만큼 ‘귀한 몸’이 됐기 때문입니다. 올해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각 팀은 구원투수를 평균 3.7명 활용했습니다. 이 역시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높은 비율입니다. 거꾸로 선발투수가 상대 타선을 3번 이상 상대한 건 953번으로 최저를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불펜투수를 쓸 일이 늘어나다 보니 이미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진 상황에서 불펜을 투입하는 걸 ‘자원 낭비’라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사실 모든 야수가 형편없는 투수였던 것도 아닙니다. 맷 데이비드슨(27·시카고 화이트삭스)은 투수로 세 경기에 나서 타자 11명을 상대해 안타 하나, 볼넷 하나만 내주고 무실점으로 3이닝을 막아냈습니다. 탈삼진은 2개. 브랜든 딕슨(26·신시내티 레즈)도 투수로 두 경기에 출전해 상대 타자 4명을 모두 범타로 돌려세웠습니다. 그 밖에 총 19명이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쳤습니다. 야수가 마운드에 오른 전체 64번 중 22번(34.4%)은 무실점 경기였습니다.
투수 못지않게 빠른 공을 던진 야수도 있습니다. 찰리 컬버슨(29·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은 속구를 총 9개 던져 평균시속 92.2마일(약 148.4km)을 기록했습니다. J. D. 데이비스(25·휴스턴 애스트로스)도 빠른 공 평균속도가 91마일(약 146.5km)을 기록하면서 ‘90마일 클럽’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빠른 공 평균속도가 시속 90마일을 넘긴 야수는 이 2명뿐입니다.
거꾸로 시카고 컵스 1루수 앤서니 리초(29)가 제일 느린 공을 던졌습니다. 리초는 7월 23일 안방 경기에서 A. J. 폴록(31·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을 상대로 공 2개를 던져 중견수 뜬공을 빼앗았습니다. 투구 정보 시스템 ‘Pitch F/X’는 이 공을 속구, 그러니까 빠른 공이라고 판별했지만 평균속도는 58.1마일(약 93.5km)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올해 야수들의 속구 평균속도는 79마일(약 127.1km)입니다.
한국도 와이 낫?
KBO 정규리그에서 마지막으로 마운드에 오른 야수인 최정(SK 와이번스).(왼쪽) 한국의 오타니 쇼헤이라는 별명을 가진 KBO 신인 강백호(kt 위즈). [동아DB]
당시 승률 계산법은 무승부를 패배와 똑같이 취급했습니다. 그러니까 동점으로 연장 12회 말을 맞았다는 건 방문 팀 SK로서는 이미 경기를 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당시 SK를 이끌던 김성근 감독은 윤길현(35), 이승호(37), 전병두(34) 등 투수 3명이 엔트리에 남아 있었지만 더는 투수를 소모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지금은 무승부도 무승부대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연장 12회 말이라고 야수가 마운드에 오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점수 차가 크게 나는 9회에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감독들 생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고는 싶은데,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 팬들은 물론 상대 팀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직은 조심스럽다는 이야기입니다.
프로야구는 올해 기준으로 한 시즌에 팀당 144경기나 치릅니다. 한 경기 결과가 전체 승률에 1%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져도 괜찮은’ 경기가 많고, 또 질 때도 ‘잘 져야’ 다른 경기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굳이 마운드에는 꼭 전문 투수가 올라야 한다고 계속 주장할 이유가 있을까요.
‘경기 결과에 관계없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게 프로’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물론 있을 겁니다. 그런데 1점이라도 더 내고, 더 막으려 이를 악물고 뛰는 것만이 꼭 최선을 다하는 건 아닙니다. 이미 승부가 기울면 야구장을 찾은 관중은 하나 둘 떠나고, TV 중계를 지켜보던 팬들도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게 마련. 이 팬들에게 끝까지 즐거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건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닌가요?
혹시 압니까.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야수 등판이 늘어나다 보면 한 경기에 투수와 포수로 모두 출전하고 홈런까지 기록하는 선수가 나올지. 그런 선수, 저만 보고 싶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