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86

2011.05.09

문화대통령 내면 지키기 몸부림이 아닐는지

서태지의 ‘신비주의’

  • 김용희 평론가·평택대 교수 yhkim@ptu.ac.kr

    입력2011-05-09 11: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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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대통령 내면 지키기 몸부림이 아닐는지
    공격적으로 보일 만큼 자기 노출을 지향하는 시대다. 몇 해 전 김용철 변호사가 쓴‘삼성을 생각한다’와 최근 신정아가 펴낸 ‘4001’이 세간에 충격을 던진 것은 대범한 실명거론과 자기고백 때문이다. 그들의 책이 내부 고발자적 양심에 따랐든, 탐욕의 질주에서 낙오된 자의 자기변명을 담았든 중요한 것은 남김없이‘까발린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지없이‘까발림’의 시대를 살고 있다. 사이버리즘의 세계가 도래하자 사람들은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홈페이지는 블로그로, 블로그는 싸이월드로 넘어갔고, 싸이월드는 다시 트위터로 넘어갔다. 소셜네트워크 속에서 페이스북과 ‘카카오 톡’(일명 카톡)을 통해 자기 일상과 의견을 공개한다. 그날의 일기를 온라인에 공개하고 ‘남친·여친’과 찍은 은밀한 사진을 웹세상에 올린다. 자신이 자신을 찍는 ‘셀카’와 찍고 있는 카메라를 다시 찍는‘몰래카메라’의 나르시시즘이 등장했다.

    은닉하는 삶을 높이 평가하던 때가 있었다. 이를 동양적 은둔이라 부르기도 했다. 입신양명이라는 유교적 덕목이 대세였지만, 강호에서 물러나 ‘처사’의 삶을 즐기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강호는 사람들의 탐욕과 말과 욕망이 들끓는다. 영화 ‘동방불패’는 강호를 떠나고자 하는 고수와 강호에서 최고가 되려는 고수의 대결이다.

    서태지를 두고 그가 강호를 떠나고자 한 고수였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중시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를 ‘신비주의자’라 명명한 데는 자본주의 시장논리가 깔려 있다. 그는 1990년대 신세대문화의 대변자로, 기성문화에 대한 저항을 신세대적 정체성으로 발현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논리는 저항을 또 다른 자본의 논리로 둔갑시켰다. 그의 은둔이나 음악에 대한 집중마저도‘신비주의’라는‘전략’의 한 방편으로 생각했다. 1집‘난 알아요’의 폭발적 성공 이후 서태지가 매체 노출을 자제한 것은 음악적으로 생명력을 길게 갖기 위해서였다. 방송 매체에 의해 만들어진‘인기’라는 불씨는 모든 것을 태울 듯 타오르지만 얼마 안 가 잦아들어 결국 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인으로서 연예인은‘인기’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사생활까지) 팬들과 공유해야 할‘역설적 운명’을 지닌 자들인지 모른다. 이들의 밝히지 않은‘사생활’이 대중에겐 ‘배신’이 될 수도 있다. 연예인은 대중의 사랑으로 살아간다고들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팬이란 질투심 넘치는 애인처럼 언제든 사랑을 증오나 미움으로 바꿀 수 있는 자들이다. 인기는 연기와 같아서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꿈에서 깨고 나면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없다.



    대중을 쫓아다니거나 대중에게 쫓겨 다니는 불쌍한 스타를 보고 있노라면 그에게 진정 자신의‘내면’을 지켜낼 ‘은밀한 힘’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금방이라도 싸늘하게 등을 돌리는 까다로운 대중 자본에‘영혼’을 헌납당한 채 인기 한 조각을 애걸복걸 구걸하면서, 홑겹만 남은‘불안한 인기’에 전전긍긍하는 게 이 시대 스타다. 얼마 전 있었던 모델 김유리의 죽음은‘죽음의 다이어트’와 싸우는 화려한 모델의 황폐한 이면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서태지가 잠적과 은둔을 계속하는 것은 단순한 신비주의가 아니다. 대중의 열광과 무관심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자신의 음악을 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서태지와 이지아의 결혼, 이혼이 최근 핫이슈다. 이지아와 별개로 서태지가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스타의 삶과 한 개인의 삶 중 어느 쪽을 받아들이느냐는 대중의 몫이다. 다만 이번 일로 스타에게도 한 개인으로서의 삶이 있고, 자신의 내면과 세계를 지키기 위한 험난한 고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나 할까, 뭐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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