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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길의 놀라운 편집의 힘

가슴으로 쓴 메시지 세상과 소통하다

시 한 줄의 힘

  • 김용길 동아일보 편집부 기자 harrison@donga.com

가슴으로 쓴 메시지 세상과 소통하다

가슴으로 쓴 메시지 세상과 소통하다
시의 힘이 많이 약해졌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시집 코너는 해가 갈수록 구석으로 밀려난다. 실용서 코너는 북적이지만, 모국어의 결정체인 시가 깃든 시집 코너는 조용하다. 펼쳐 보는 손길이 드물고 소박한 시집은 밤새 뒤척이며 홀로 제 시를 쓰다듬는다. 시는 시인이 헤아릴 수 없는 사념을 축적해 건져 올린 진실 꾸러미다. 시인의 언어 조탁 행위를 통해 우리말은 더욱 빛나고 감동의 매개체가 된다.

편집자로서 시를 통해 언어의 정갈함을 배운다. 쏟아지는 말의 성찬보다 단아한 한마디 문장의 힘을 믿는다. 시인은 심정의 우물을 들여다보고 언어를 길어 올린다. 신문 편집자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헤드라인으로 세상을 명명한다. 편집자는 늘 시인을 좇는다. 시인이 옹색해지는 시대엔 편집자도 궁색해진다. 시인과 편집자는 ‘언어의 조탁’이라는 우정을 두르고 때때로 어깨동무한다.

가슴이 휑해질 때 시집을 펼쳐 본다. 불온한 시대의 시 한 편은 시대의 심정을 꿰뚫는 메타포였다. 시의 힘은 이미지의 힘이고 메시지의 힘이다. 60여 편의 시를 묶은 한 권의 시집엔 작고 외롭고 사소한 것을 통해 본 세상사 이치가 형상화돼 있다. 시집 제목은 세상을 향한 시인의 말 걸기다. 한 시대의 이름이 된 시집이 있다. 시대의 명명력을 획득한 시집 타이틀은 문학의 기억장치로 오래오래 남는다.

‘섬’ ― 정현종, 1991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시인의 가장 짧은 시다. 1991년 출간한 시집 제목은 바로 이 짧은 시의 첫 문장에서 따왔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문장은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군더더기 하나 없이 설파한 절창이다. 세인은 정 시인의 수백 편 시 가운데 그를 연상하는 핵심 이미지로 이 타이틀을 떠올린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中 ― 정희성, 1978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정희성 시인이 1978년 펴낸 두 번째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시집 제목으로는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명 타이틀로 평가된다. 묵묵한 노동. 하루의 저묾과 삽자루에 맡긴 인생의 저묾. 썩어가는 샛강에 비친 달. 개발독재시대를 사는 도시 빈민의 열악한 상황을 극명하게 암시했다. 고단한 노동의 삶을 여덟 글자에 탁월하게 압축했다.

‘눈물은 왜 짠가’中 ― 함민복, 2003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 주셨습니다. (중략)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시인은 가난을 통탄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날선 폭력성을 탓하지 않는다. 가난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고, 가난과 뒤섞이며 살아가는 일상적 느낌이 무엇인지 담담하게 들려준다. 피부처럼 살가운 가난 속 어머니의 사랑이 가슴 절절하게 와 닿는 작품이 바로 ‘눈물은 왜 짠가’다. 힘겨운 삶을 헤쳐나갈 수 있는 ‘성장 동력’은 바로 ‘가난 속 어머니의 힘’이 밑받침하는 덕에 가능했다. 여전히 가난한 21세기 일상 속 사람은 함 시인의 짜디짠 눈물로 위로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주간동아 804호 (p65~65)

김용길 동아일보 편집부 기자 harri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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