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8

2009.08.11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 ‘U턴’

미디어법 후폭풍 朴근혜의 손익계산서 … 확실한 ‘존재감’에도 비난 여론 역효과

  • 송국건 영남일보 서울취재본부장 song@yeongnam.com

    입력2009-08-05 12: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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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 ‘U턴’

    미디어관계법이 의장 직권상정된 7월22일, 여야 의원들은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서 격한 몸싸움을 벌였다.

    친박(親朴·친박근혜) 중진 의원 사이에서는 최근 박근혜 전 대표의 지근거리에서 움직이는 3명의 의원들을 지목해 “보좌를 잘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쏟아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비판의 대상이 된 의원은 박 전 대표의 비서실장 구실을 하는 유정복 의원(경기 김포), 비서실장을 지낸 이성헌 의원(서울 서대문갑), 그리고 이정현 의원(비례대표)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요즘 박 전 대표와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누는 세 사람이 제대로 보좌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친박 진영 사이에서 불거지고 있다. 사안에 따라 직언도 해야 하는데, 박 전 대표가 한 말이라고 그대로 (기자들에게) 전달하고 맹종하는 태도는 결코 박 전 대표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이 많다”고 말했다.

    사연은 7월19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736호실. 한나라당 홍사덕 의원(대구 서구) 사무실에 친박 중진 의원 15명가량이 모여 앉았다. 얼마 전 ‘원내대표 추대 카드’가 무산된 이후 박근혜 전 대표와 서먹해진 것으로 알려진 김무성 의원(부산 남구을)의 모습도 보였다.

    서로 긴급하게 연락을 취해 모인 이들의 얼굴에는 낭패감이 가득했다. 이날 박 전 대표가 미디어관계법 직권상정 후 강행 처리를 위한 한나라당의 국회 본회의 소집과 관련해 “참석하게 된다면 ‘반대표’를 행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때문이다.

    그들은 박 전 대표의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을 불렀다. 이 의원은 박 전 대표의 ‘반대표 발언’을 대신 전한 인물이다. 중진 의원들이 다그쳐 물었다. “정말로 박 전 대표가 그런 말씀을 하시더냐.” 초선인 이 의원은 전혀 눌리지 않고 대답했다. “그대로다. 발표하라고 하신 내용 그대로 발표했다.”



    그러자 김 의원이 “대표가 그런 말씀을 했더라도(이 의원이 다른 의원들과) 상의를 거쳐서 해야지, 그대로 (기자들에게) 전하면 되겠느냐”고 나무랐다.

    “오버했다” 친박 진영서도 우려

    잠시 후 친박 진영의 최다선(6선)인 홍 의원이 박 전 대표와 직접 통화했다. 그는 이 의원이 전한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중진 의원들의 입장을 설명했다. 박 전 대표의 수긍을 받아냈는지 홍 의원은 곧바로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가졌다.

    “박 전 대표의 정확한 뜻은 (미디어관계법) 직권상정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여·야 합의를 위해 더 노력할 수 있음에도 내일 당장 직권상정을 한다는 데 반대하는 것이다. 합의를 위해 노력하다가 안 된 상태에서 직권상정으로 처리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 ‘U턴’

    7월15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동료 의원과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박 전 대표의 말 한마디에 한나라당은 다시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민주당과의 견해 차이로 합의 처리가 여의치 않자 ‘박근혜 절충안’을 반영한 미디어관계법 개정안을 7월22일 본회의에 직권상정한 뒤 난투극 끝에 강행 처리했다.

    이렇게 미디어관계법 개정을 밀어붙인 후폭풍이 아직도 여의도 정가를 흔들고 있다. 방송법 재투표 무효 논란이나 대리투표 시비도 그렇지만, 한나라당이 정치 논리에 의해 ‘반쪽짜리 미디어관계법’을 통과시킨 데 따른 역풍이다.

    그 후폭풍의 중심에 박 전 대표가 서 있다. 여권 지도부가 ‘결단’을 내려 자체 수정안을 직권상정하기 직전에 ‘비토’를 놓았다가, 자신의 절충안이 포함된 수정안의 강행 처리에는 동의한 데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은 까닭이다. 그렇다면 박 전 대표가 이번 미디어관계법 처리에 개입해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박근혜의 힘’을 거듭 확인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힘을 너무 과시한 탓에 견제 여론이 형성됐다. 여권 내부, 심지어 친박 진영에서도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무엇보다 ‘친이(親李·친이명박)’ 세력에서 “또 발목을 잡았다”는 비판이 거세다.

    친이 진영의 한 의원은 “박 전 대표의 미디어관계법 발언이 나오기 전까지 당 차원에서 친박 세력을 끌어안기 위해 다양한 화합책을 마련했다. 친박 의원 입각, 서청원 전 친박연대 대표 사면복권 등에 대해 친이계가 앞장서서 청와대에 건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박 전 대표의 ‘반대표’ 발언으로 당분간 그런 의견을 꺼내기 어렵게 돼버렸다”고 말했다.

    친이 진영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친박 세력 안에서조차 박 전 대표의 ‘한마디 정치’에 짜증을 내는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은 심상치 않다. 친박 진영의 한 중진 의원은 “박 전 대표의 ‘반대표’ 발언이 나왔을 때는 (미디어관계법 강행 처리를 위한) 타이밍이 피크에 올랐을 때 아니냐”며 “차라리 직권상정을 결정하기 전에 입장을 밝혔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7개월을 끌어온 미디어관계법을 놓고 막판에 ‘반대표’를 거론하면서 절충안을 제시한 바람에 결국 ‘누더기 법안’을 처리하게 만들었다는 아쉬움이었다.

    “권외 지도자로 확실한 자리매김”?

    사실 친박 진영은 겉으론 굳건한 결속력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론 이명박 정부를 도와야 한다는 ‘참여론’과 아직은 주류 측에 맡겨야 한다는 ‘신중론’이 맞서 있다. 김무성 의원의 원내대표 추대 불발이나 개각을 앞두고 흘러나오는 친박 인사 입각설에 대한 찬반 의견 등이 모두 같은 맥락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 전 대표의 주변을 둘러싼 측근들이 ‘주군’의 눈과 귀를 막고 있다는 지적이 내부에서 제기된다는 점은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

    박 전 대표가 미디어관계법에 대해 ‘반대표’ 발언을 했다가 수정안이 나오자 직권상정에 찬성하는 태도를 보인 데 대해선 일반 국민도 실망스럽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각종 여론조사 결과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그의 이번 선택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박 전 대표는 미디어관계법 관련 발언으로 존재감을 뚜렷이 각인시켰다. 이는 향후 정국의 화두로 떠오를 수 있는 모든 사안에 대해서도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자, ‘권외 지도자’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박 전 대표의 힘은 7월23일 실시된 한나라당 서울시당위원장 경선에서 소장파와 친박계의 지원을 받은 권영세 의원이 친이재오계와 정몽준 최고위원을 등에 업은 전여옥 의원을 물리친 데서도 확인됐다. 서울 지역 48명의 당협위원장 가운데 ‘확실한 친박’은 5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권 의원이 이겼다.

    한 전직 의원은 “친이 의원 대다수가 초선이어서 조직 장악력이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단지 그뿐일까.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박 전 대표에게 세(勢)가 쏠리는 현상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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